[욜로 라이프] 김경렬 ‘서초동 비밀과외’ 강사
[캠퍼스 잡앤조이=강홍민 기자] “제 주변엔 영어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 있었어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영어로 힘들어 하는 이들 말이에요.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이 일을 선택했습니다.”
한때 뉴요커로 각광받던 청년이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변신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오가며 학창시절을 보낸 김경렬(에드윈·34)씨는 한국계 미국인, 아니 한국인이다. 미국의 유망 기업에 합격하고도 고국으로 돌아와 군 제대 후 스스로 영어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한 줄기 빛이 되겠다고 나섰다.
날 때부터 따라다니는 꼬리표 ‘Korean-American(한국계 미국인)’
김 씨는 1970년대 가족 모두 미국 이민을 선택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아시아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미국 뉴욕의 롱아일랜드지역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놀림과 따돌림을 당한 김 씨는 어릴 적부터 정체성 혼란이라는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어요. 친구들이랑 숨바꼭질을 할 때였는데, 숨어 있는 저를 발견한 흑인 아이들이 와선 눈을 손가락으로 찢는 모습으로 인종차별적인 노래를 불렀어요. 그땐 어리기도 했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죠. 그때 그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요.”
김 씨는 9살이 되던 무렵 지독한 향수병에 걸린 부모님을 따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던 그는 한국에서의 삶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출생지인 미국에서도 그랬듯이 한국에서도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영어 붐이 일어나던 시기였어요. 학교에 시청각실도 생기고, 영어 수업도 늘어나던 시기였죠. 우리 반에 미국에서 온 아이가 저 포함 두 명이었는데, 어느 날 영어 선생님께서 그 친구에게 영어 읽기를 시키셨어요. 그 친구는 원래 하던 것처럼 유창하게 읽기 시작했죠.
수업을 마치고 반 아이들이 그 친굴 왕따를 시키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다음 수업 때 선생님이 나를 시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집에서 콩글리쉬 발음을 연습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수업 때 선생님께서 절 시키셨죠. 그래서 연습한 콩글리쉬 발음으로 읽었더니 친구들이 오히려 위로를 해주더라고요.”
또 다시 미국행으로 찾아온 시련
나름의 생존 전략으로 한국에서 적응하고 있던 그는 중 3이 되던 무렵 다시 미국행을 선택했다. 정확히 말하면 부모님의 선택이었다. 소위 SKY 대학으로 진학을 원했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김 씨는 자아가 형성되던 시기에 또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말 가기 싫었어요. 한국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던 시기였는데, 다시 미국으로 간다는 게 너무 싫었죠. 그러다 우연히 홍정욱 씨가 쓴 ‘7막 7장’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가슴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책을 다 읽곤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죠.”
다시 간 미국은 어릴 적 살던 미국과는 달랐다. 백인보다 이민자들이 많았고, 그들 사이에 세력다툼도 있었다. 첫 입학하던 날 학생들은 인종별로 무리지어 나눠져 있었고, 교포와 이민자들 간의 싸움도 있었다.
“전 어디에도 낄 수가 없었어요. 이민자도, 그렇다고 유학생도 아닌 애매한 신분이었거든요. 뉴욕 퀸즈에 있는 학교였는데 졸업률이 38% 밖에 안 되는 최악의 학교였어요. 그 안에서 뭔가를 꿈꾼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어요.”
영어 하나로 생존 전략 수립
김 씨는 이민자들이 많던 그 학교에서 그나마 영어 하나는 자신 있었다. 한국인을 비롯한 많은 이민자들이 영어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도 그 무렵 알게 됐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이민자들 사이에서 그는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김 씨는 그 친구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숙제도 도와줬다. 몸이 아파 학교에 못 오는 친구 대신 결석 노트 작성도 자처했다.
누군가의 강압이 아닌 김 씨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 덕분인지 친구들의 신임을 얻은 그는 한인 클럽 회장을 비롯해 학교 임원단에도 선출됐다. 무사히 졸업한 그는 카네기멜론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시련은 또 다시 찾아왔다. 바로 정체성 혼란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괴롭혔던 정체성 혼란은 대학 졸업 후 유망한 기업에 합격통지를 받고 난 후 더 심해졌다.
“정체성 혼란 때문에 잠도 안 왔어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죠. 그때 문득 군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엔 미국 시민권자라 굳이 군대를 안가도 됐었지만 쓸데없는 야망이랄까요.(웃음) 군대를 가야겠더라고요.”
미국 기업에 합격통지서를 뒤로한 채 한국행을 선택한 김 씨의 예상대로 부모의 반대는 거셌다. 하지만 그의 고집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으로 건너 온 그는 코트라 인턴생활을 거쳐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서도 영어에 대한 관심은 마찬가지였어요. 제대를 앞둔 선임들의 관물대에는 토익, 토플 영어책이 늘 꽂혀있더라고요. 선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면서 사랑받았죠.(웃음)”
뉴요커 포기하고 영어 강사로 변신한 까닭
김 씨는 여느 청년과 마찬가지로 제대 후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처음 국내 회계법인에 입사한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몇 번의 이직을 거쳤다. 이직한 회사는 사모펀드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했다. 그의 영어실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었다. 실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던 지난해 10월, 우연히 유혜경(서초동 비밀과외) 강사를 만난 것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 그리고 군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늘 주변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영어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좀 더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까라는 고민이 있었죠. 그 무렵 유혜경 선생님의 파닉스 기법을 듣고 ‘아 이거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이직을 결심했죠.”
지난해 11월부터 서초동 비밀과외에 합류한 김 씨는 학교 및 직장생활의 에피소드와 생활영어를 바탕으로 실전 영어 강좌를 서비스하고 있다.
“전 어릴 적부터 늘 주변에 영어를 못하는 친구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영어를 쉽게 알려드리는 게 목표예요. 그리고 예전에 지인들과 ‘Hill'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편부모 가정의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영어도 가르치는 모임이었죠. 나중에 꼭 영어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khm@hankyung.com
[사진=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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