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청춘만찬] 발레리나 출신 배우 강예나 “사과도둑 모함에 화장실서 몰래 펑평 울어... 말싸움 위해 영어 빨리 배웠죠”

입력 2018-07-04 15:55   수정 2018-07-13 09:26




[캠퍼스 잡앤조이=김예나 기자]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예나(44) 씨에게는 ‘최초’와 ‘최연소’ 수식어가 유난히 많다. 한국인 최초 영국 로열발레학교 입학, 한국인 최초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과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입단, 유니버설 발레단 최연소 수석 등이다. 그런 그가 또 다른 ‘최초’에 도전한다. 바로 국내 최초 발레리나 출신 배우로의 도전이다.

26년간 발레와 함께 살아온 강 씨는 2013년 은퇴 후 영화와 연극을 오가며 배우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예기획사 씨앤코이앤에스에 둥지를 틀었다.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강 씨에 대한 느낌은 지독한 ‘노력파’란 점이다. 발레리나 시절, 강 씨는 어느 발레단에서나 가장 먼저 연습실에 들어서고 가장 마지막으로 연습실을 나서는 무용수였다. 이상적인 신체 조건과 서구적인 마스크로 성공한 것이 아닌, 노력과 성실함으로 발레리나로서의 정점을 찍은 것. 그만큼 그는 토슈즈를 벗은 후 내려온 무대 밖에서 관객이 아닌 대중과 만나기 위한 준비에도 철저하다. 

발레리나 인재 양성 등 평탄한 길을 두고도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 가슴 뛰는 일을 택한 강 씨를 지난 2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매거진 15층 회의실에서 만났다.



-은퇴 후 어떻게 지내고 있나.

“은퇴 후 영화 ‘나비처럼’ ‘버스정류장에서’ ‘흉계’와 연극 ‘발레선수’ ‘칼집속의 아버지’ 등에 출연했다. 이를 위해 꾸준히 발음 교정과 발성, 연기 공부를 했다. 최근에는 보컬 수업도 듣고 있다. 무언가를 계속 해서 배우는 것에서 생명력과 에너지를 얻는다. 쉽게 늙지 않는 비결인 것 같다. 배우로서 연기를 할 때마다 매번 설렌다. 오히려 연기가 발레보다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웃음)”

-태생부터 발레리나인 줄 알았는데.

“발레가 아니었다면, 더 일찍 연기를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연기는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발레를 했기에 연기에 도전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처음 발레를 시작했던 계기가 궁금하다. 

“외가 쪽에 음악가가 많다. 어머니도 음악(피아노) 전공 교수님이시다. 그러다보니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한 곳에 앉아만 있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림의 주제는 항상 ‘발레’와 ‘발레리나’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유니버설 발레단의 코펠리아 공연을 실황으로 본 적이 있는데, 선녀들이 무대 위를 오간다고 생각했었다. 그 느낌과 감동을 잊을 수 없어 발레 그림만 그렸던 것 같다. 이후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발레를 시작해 네 달을 바짝 배워 선화예중에 수석 입학했다. 보통의 아이들이 4~5세 때 발레를 시작하는 것에 비해 늦긴 했지만, 신체조건이 발레를 하기에 매우 적합하다며 잠재력 등을 높이 평가 받았다.”



△(왼쪽)발레를 처음 시작했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모습.


(가운데와 오른쪽)선화예중 1학년 시절. 사진=강예나 씨 제공

-뒤늦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최초로 영국 로열발레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영국 분이셨는데, 임신 후 영국으로 가신 뒤 로열발레스쿨 교장에게 나를 추천해주셔서 오디션을 봤다. 수천 명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됐다. 어린 나이에 혼자 외국에 갈 수 있겠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흔쾌히 떠났다. 그때부터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발레에 적합한 신체조건을 타고났다고 했다. 외국에 나가보니 어땠나.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로열발레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관절을 엑스레이로 찍고, 성장판이 얼마만큼 열릴지도 측정한다. 종아리와 허벅지, 목과 뼈의 길이까지 모두 재본다. 나도 그랬다. 성장한 후에 어떤 형태의 신체를 가질지를 예측하기 위해 면접장에 어머니를 모시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입학했는데, 막상 입학해보니 외국 친구들과 비교해도 팔과 다리 길이나 비율 등 신체조건이 뒤지지 않았다.”

-유학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때가 1989년도였다. 88올림픽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알지 못 했다. 더구나 한국인 학생이 처음이다 보니 인종 차별과 무시를 많이 당했다. ‘한국이 어디 있냐’ ‘한국 사람들은 자전거만 타고 다니냐’ 등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보통이었다. 한 번은 급식에 사과가 나와 한 개를 남겨뒀는데, 다른 친구가 자신의 사과가 없어졌다면서 내가 훔쳐간 것이라고 모함을 당한 적도 있다. 이런 상황들을 겪다보니 내 입장을 이야기 하고 말싸움을 하기 위해 영어가 더욱 빨리 늘었다.(웃음) 누군가에게 기대고 하소연하는 게 힘들다 보니 기숙사 불이 모두 꺼진 뒤 친구들이 잠자리에 들면 화장실에 숨어 운 적도 많았다. 그런 경험들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영국 로열발레스쿨 white lodge 앞에서 담임 선생님 페트리샤 린튼과 찍은 사진. 사진=강예나 씨 제공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도 한국인 최초로 입단했는데.

“15살 때 고등학교를 미국 워싱턴으로 가게 됐다.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당시 키로프발레단)에 계셨던 선생님들이 워싱턴에 세운 발레 자매학교였다. 한국에 잠깐 들어왔는데, 마침 그 학교 교장선생님께서도 그때 잠깐 한국에 계셔서 오디션을 볼 수 있었다. 시기가 매우 잘 맞았다.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으로 학교를 옮긴 뒤에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19살 때 마린스키발레단이 미국에 와서 한 달 가량 투어를 했는데 당시 학생 대표였던 내가 주역으로 발레단 수석 무용수와 함께 공연을 했다. 그걸 계기로 1994년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하게 됐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모두 능통했겠다. 

“러시아어는 고등학교에서 배웠다. 선생님들이 러시아 분들이셨다. 영어는 ‘생존 영어’만 써서는 안 됐다. 방학 때 한국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미리 등록해둔 영어 학원에 다녔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영어 문법과 회화 수업들로 스케줄이 꽉 짜여 있었다.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왔어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며 늘 그렇게 바쁘게 보냈다.”

-어머니께서 교육열이 상당하셨던 것 같다.

“맞다. 내게 어머니는 푸근한 이미지가 아니라, 선생님 같은 느낌이다.(웃음) 방학 때 한국에 들어오면 외국어 공부 뿐 아니라 신문과 시집 등을 계속해서 읽게 하시기도 했다. 훗날 유명해지면 인터뷰를 많이 해야 하는데, 한국말을 어눌하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말이다. 어머니는 서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언니와 나를 두고 홀로 콜롬비아 대학에 유학을 다녀오실 만큼 교육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에게 ‘무서운 선생님’이셨고, 오히려 언니가 엄마 같은 푸근한 존재였다. 하지만 같은 예술인으로서 음악적인 조언은 정말 많이 해주셨다. 쇼팽 음악으로 작품을 할 때 쇼팽 음악만 듣다가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이러한 감정을 완화하기 위해 바하의 음악을 들으라거나, 발레 선생님이 음악에서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가라고 하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조언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타고난 신체조건과 어머니의 교육열만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했을 텐데.

“나는 항상 연습실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몸을 풀었다. 미국에서의 별명이 ‘얼리버드’였을 정도다.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스타일이었다. 워낙 발레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이 연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신체조건이 겉보기에는 발레에 이상적인 것 같은데, 속은 탄탄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골반이나 인대가 유연하면 연습을 오래해도 쉽게 다치지 않고 부상을 당해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 했다. 선천적으로 무릎도 약했다. 그래서 늘 남들보다 먼저 연습실에 가서 몸의 긴장을 풀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에 있을 때 댄스매거진에서 무용수들의 워밍업(warming up)과 관련한 특집 기사를 낸 적이 있는데, 그때 발레단에서 나를 추천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기관리를 확실히 했다.”

-ABT에 입단한 얘기를 들려달라.

“1996년 유니버설발레단(UBC)에 최연소 수석 무용수로 입단한 이후 1998년에 UBC사상 첫 북미투어를 하며 뉴욕 시티센터에서 공연을 했다. 마침 딱 하루 공연이 쉬는 날이 있었는데, 무작정 ABT에 찾아가 한 번만 클래스를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당시 예술 감독인 케빈 맥캔지가 내가 하는 걸 보고 5분 있다가 나가더니, 10분 뒤 예술관련 스태프를 다 데리고 와서 봤다. 그 다음날 UBC의 ‘백조의 호수’ 공연이 있었는데, 이 공연을 본 ABT 예술감독이 내 입단을 결정했다. ABT의 오디션을 보는 기회도 하늘의 별따기 인데, 한국인 최초로 솔리스트로 입단하게 됐다.”

-계속 해서 ‘최초’와 ‘최연소’ 타이틀을 달았다. 이에 대한 부담감과 중압감도 컸을 텐데.

“사실 그 당시에는 그런 자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감사한건지 잘 알지 못 했다. 발레를 시작한 이후부터 막힘없는 행보를 이어갔기 때문에 그저 내 실력이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얻은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오만했다. 어린 나이에 높은 타이틀을 갖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무대가 무서워졌고, 즐길 수 없게 됐다. 무대에 오르면 다른 선배님들이 호응해주는 것이 아니라, ‘쟤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 ABT에 입단한지 2개월 만에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그동안 느꼈던 부담감과 중압감, 계속해서 이어왔던 혹독한 관리 때문에 갖게 된 건강 문제 등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정상의 자리에서 부상을 당했다. 많이 좌절했을 것 같은데.

“수술과 재활 치료로 9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다시 무대에 오를 때는 여전히 아픈 상태였기 때문에 무대 제일 뒷줄의 군무부터 시작했다. 다시 솔리스트의 역할을 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때 느꼈던 열등감을 잊을 수 없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때 느낀 열등감과 좌절감이 무용수로서의 제2의 전성기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재활에 매달리며 발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내 모습을 재발견했고, 그 힘으로 계속 해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밑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리며 내공을 다질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부상 이후 다시 무대에 섰을 때,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했고 발레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됐다. 어머니께서도 ‘물이 차가운 온도에서 얼고, 생선에 따가운 소금을 뿌리는 이유는 썩지 않기 위해서’라며, 한 자리에 고이거나 썩지 않기 위해 나에게 이런 고통의 시간이 온 것이니 기회로 삼으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사실 그 당시 발레와 무대에 대한 부담감이 커져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때 다치지 않았으면 발레를 더욱 빨리 그만 뒀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인생의 반이 넘는 시간을 발레를 하며 보냈는데, 막상 은퇴를 결심했을 때의 심경은.

“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무대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대부분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은퇴를 선택한다. 나 역시 39살에 은퇴했다. 요즘은 고령의 무용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도 많아지고, 작은 프로젝트 형식의 공연도 많아졌지만 예전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은퇴를 할 때는 그간 발레를 하면서 느꼈던 것을 어떻게 잘 풀어낼 수 있을까를 계속 해서 고민했던 만큼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은퇴를 앞둔 1년 반 전부터 무용복 브랜드를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복 브랜드 예나라인’ 사업을 2년여간 했다. 

디자인부터 제작, 판매와 배송 등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았다. 사진=강예나 씨 제공

-무용복 사업은 어땠나.

“원래 패션 쪽에 관심이 많았고 무용복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다. 무용복 브랜드 예나라인을 만들어 디자인과 제작부터 포장과 배송, 판매까지 모든 것을 혼자 했다. 무용복은 무용수들에게 제2의 피부와도 같기 때문에 직접 입어보고 느낀 점들을 디자인이나 제작에 반영했다. 현장에서 어떤 옷이 필요한지를 알기 때문에 틈새시장을 노리는 디자인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또 무용수들뿐 아니라 취미로 무용을 하는 일반인들도 입을 수 있는 감각적인 의상과 무용복의 중간 라인을 만들고자 했다. 경영을 해 본적이 없어 곧바로 현실을 알게 됐지만, 디자인부터 원단 선정, 제작까지 모든 것을 나 혼자 했기 때문에 매우 자유로웠다. 예술가로서 창의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던 시기였다. 이후 연극을 시작하고 연기수업을 하면서 사업은 접게 됐다.”

-처음 연극 무대에는 어떻게 오르게 됐나.

“2014년도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 때 축하공연을 했다. 계속 사업만 하다가 오랜만에 무대에 올라가게 됐는데, 각 장르의 아티스트들과 만나 잊고 있던 느낌을 받으니 너무 좋았다. 몇 달간 무대를 준비하며 행복했는데, 오히려 그 후에 더욱 침체됐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생각하던 차에 운명처럼 김수로 프로젝트 연극 10탄 ‘발레선수’라는 연극을 알게 됐다. ‘댄싱9’에 출연한 최수진 씨를 통해 김수로 씨의 연락처를 얻었고, 그날 저녁에 대학로에서 만나 하루아침에 연극을 하게 됐다. 훌륭한 배우들과 무대 위에서 호흡을 맞출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맨위부터연극 ‘발레선수’와 칼집속에 아버지’, 다양한 단편 영화에 출연한 배우 강예나 씨의 모습. 

사진=강예나 씨 제공

-은퇴한 발레리나가 연기에 도전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외국에서는 발레리나들이 은퇴 후 매우 다양한 일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부분 지도자의 길에 들어서는 것 말고는 다양한 분야의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후배들은 내가 다른 분야에서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자극 받는다고 이야기 한다. 앞서 길을 만들어놓은 후, 무용계 후배들이 연기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끌어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마흔이 넘어서 시작한 도전이다. 주변의 반대는 없었나.

“어머니께서 매우 반대하셨다. 발레리나로서 정점을 찍었는데, 늦은 나이에 연예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것을 많이 걱정하셨다. 후배 양성이나 레슨 등 명예로운 길도 있는데 순탄하지 못한 길을 택한 것에 대한 걱정이셨을 거다. 하지만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가 마음을 돌리셨다. 첫 공연과 중간 공연, 마지막 공연을 모두 봐주셨는데, 내가 정말 무대를 즐거워하고, 매번 발전하는 것 같다며 ‘대중 앞에 서야하는 팔자인가보다’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연극과 영화, 본인에게 어떤 장르가 더 잘 맞나.

“연극은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발레와 비슷하다. 장르와 상관없이 ‘무대 룰’은 모두 비슷한 것 같다. 30년 간 무대에 오르던 사람이다 보니, 아직은 무대에 서는 것이 더 잘 맞는다. 하지만 같은 무대 공연임에도 발레는 무대 위에서 소리를 직접 낼 일이 없다. 그렇기에 오랜 기간 연극을 해온 다른 배우만큼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감정 표현이나 자질은 있음에도 발성이나 소리를 내는 부분이 부족하다 보니, 영화와 TV 출연 등 매체 연기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연기를 하는 데 발레리나로서의 경험은 도움이 되나.

“발레리나는 신체로 말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신체적인 자유로움이 분명히 있다. 몸이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내 장점이다. 외국 같은 경우는 배우를 한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발레를 다 배우기 때문에, 나는 기본기는 탄탄하게 다졌다고 생각한다. 또 외국에서 활동해서 외국어 연기도 할 수 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소감 한 마디.

“내가 받은 축복 중 하나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확실히 알았다는 점이다. 또 큰 혼란기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한창 전성기였던 시기에 찾아온 부상으로 슬럼프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한 계기로 삼았다. ‘연기’라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동안 책임감과 노력으로 발레리나로서 많은 성과를 얻었던 만큼,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배우로서의 삶에 올인할 생각이다. 세계적인 발레리나에서 새내기 배우가 된 강예나의 진심을 느껴주시리라 믿는다.”

yena@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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