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영, 팟캐스트·SNS라이브서 날 것 그대로 공개
[캠퍼스 잡앤조이=강홍민 기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뮤지션의 ‘청춘’은 어떠했을까. 90년대 국내 가요계의 한 획을 그은 가수 현진영(47)은 1990년 <현진영과 와와>로 가요계 입문해 당시 대중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힙합 음악과 춤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992년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히트로 전국 초·중·고 학생들 사이에서 후드 티 열풍의 주역이기도 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유일한 라이벌로 꼽혔던 그의 고공행진은 그리 길진 않았다. 워낙 어린 나이에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탓인지 그는 데뷔 이후 수차례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 대중의 외면은 당연했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인기도 한 순간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약물 복용이라는 꼬리표만 남은 현실 속에서도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 그 끈기 덕분에 ‘데뷔 28주년’이라는 타이틀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근 팟캐스트, SNS라이브 방송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가수 현진영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요즘 근황은.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 팟캐스트 <매불쇼>에 매주 목요일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다. 웬만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보다 훨씬 반응이 좋다. 욕을 많이 먹긴 해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신다.(웃음)
-팟캐스트, 그리고 SNS 라이브에서 인기가 많은데, 비결이 뭔가.
방송의 개념 차이인 것 같다. 팟캐스트는 일반 라디오와는 다르게 접근해야 대중들이 좋아한다. 틀에 박힌 멘트 말고 직설적이면서 솔직한 자세가 인기의 비결이 아닐까. 예를 들어 “존경하는 가수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팟캐스트에선 “없어. 난 나만 존경해”라고 말한다.(웃음) 예전에는 그렇게 방송하면 질타를 받았다면 요즘엔 오히려 그런 부분을 더 재미있어하는 것 같더라.
-원래 성격인가.
원래 성격도 있고, 방송에서 재미있게 하려고 캐릭터를 잡은 면도 있다.
-팟캐스트 장르가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데뷔 땐 신비주의 콘셉트로 예능프로그램을 못 나갔다. 설령 방송에 나가더라도 이수만 선생님이 아예 말을 못하게 했다.(웃음) 근데 요즘은 시대가 변하지 않았나. 자기PR 시대를 넘어 스스로를 잘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실수를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시대다. 팟캐스트나 SNS 라이브를 통해 가수 현진영의 날 것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SNS 라이브 방송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몇 년 전에 발매한 ‘무념무상’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방송국에서는 ‘흐린 기억속의 그대’와 ‘소리쳐 봐’만 불러달라고 하더라. 신곡이 나왔는데 부르지도 못하니까 속상하더라. 그래서 내가 직접 방송을 하면서 내 곡을 홍보해야겠다는 생각에 SNS 라이브를 시작하게 됐다. 그 계기로 신인 아이돌 그룹을 소개하는 ‘현진영GO 진영GO 라이브’ 모바일 예능을 판도라TV에서 제작했는데, 100만 뷰 이상 나왔다.
-최근에 활동 중인 아이돌 중에 눈에 들어오는 팀이 있나.
다들 (실력이)고만고만하다. 어떤 곡으로 하느냐, 어떤 프로듀서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 데뷔한 친구들의 실력은 거의 비슷해 보인다.
-데뷔는 언제인가.
1990년 ‘슬픈 마네킹’으로 데뷔했다.
-춤은 언제부터 췄나.
아마 5~6살 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릴 적 미8군 근처에 살았는데, 동네에 흑인들이 많았다. 동네 골목에서 힙합 노래를 틀어 놓고 춤추며 노는 게 일상이었다. 중 2땐 대학로로 진출해 춤을 추다가 당시 비보이팀이었던 ‘스파크’에 합류하게 됐다. ‘스파크’에는 이주노, 신철 형님이 있었다. 그 형들 따라 행사도 많이 다녔었다.
-중 2때면 꽤 어린 나이였는데, 공부보다 춤을 더 좋아했었나보다.
어머니께서 중 1때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집이 부유한 편이었는데, 오랜 투병으로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도 쓰러지셨다. 어린 나이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중 2때부터 신문, 우유배달을 하고 식당에서 접시도 닦았다. 밤에는 행사를 다니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현진영 씨가 24세 때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사진제공=현진영)
-학창시절 추억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난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해서 학창시절의 에피소드가 딱히 없다. 중 2때부턴 일하고 춤을 췄기 때문에 학교에선 거의 잠만 잤다. 밤업소에서 공연을 하고 받은 돈을 업소 직원들한테 빼앗기기도 했다. 그땐 참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 죽을 생각도 몇 번 했다. 한강에서 2번이나 뛰어내렸는데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는지 살게 되더라.
-현진영 하면 춤 실력으론 소문이 자자했다고 들었다. 당시 춤 실력이 어느 정도였나.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춤은 잘 췄다.(웃음) 어릴 때부터 노는 게 춤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잘 춘 건 사실이다. 춤을 잘 추니까 다른 팀에서 스카우트를 많이 했었는데, 단돈 5만원만 더 줘도 팀을 옮길 정도였다. 당시 그 바닥에서 현진영 하면 의리 없는 놈으로 찍혀 있었다. 형편이 어려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나고 보니 오히려 잘 된 것 같더라. 팀을 옮기면서 장르가 다른 춤을 배웠으니까. 그 덕분에 몸값이 많이 올라 클럽 전속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왼쪽 아래부터)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대표, 이현도, 현진영, 故김성재 씨.
-SM엔터테인먼트 초창기 소속 가수였다. 이수만 대표와는 어떤 인연이 있나.
80년대 후반 토끼 춤이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토끼 춤을 어릴 적부터 흑인 친구들과 놀면서 추던 춤이었기 때문에 익숙했지만 국내에서는 그 춤을 추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클럽에 전속 댄서로 있을 때 춤 잘 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수만 선생님이 나를 보러 직접 보러 오셨다. 당시에 이수만 선생님이 토끼 춤에 맞는 흑인 음악을 만들어 놓고 그 노래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들었다. 내 춤을 보고 영입하신 거다.
-당시 춤꾼들의 아지트로 불리던 이태원 ‘문 나이트’도 유명했다. 당시 문 나이트에서 함께 춤을 췄던 연예인은 누가 있었나.
(박)남정이 형, (이)주노 형, 양현석, 서태지, 쿨의 (김)성수 형이나 (이)재훈이···. 당시 문 나이트는 춤 연습장소나 마찬가지였다. 이수만 선생님이 데뷔 전 혹여나 소문이 날 수 있으니 거기서 연습하라고 하셨다. 그때의 스토리를 잘 모르던 사람들은 문 나이트에서 연예인들을 배출한 걸로 알고 있는데, 댄서들이 모여 춤 연습하고 경연대회를 하던 곳이었다.
-지금이야 힙합 장르가 대중화가 됐지만 90년대에는 비주류 장르였다. 활동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
그땐 사람들이 힙합이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했다. 인터뷰 때 힙합음악을 한다고 하면 댄스뮤직이라고 바꿔 나가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무대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MBC)’였는데 관객들이 춤을 추는 나를 원숭이 보듯 하더라. 박수도 안치고 멍 하니 신기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솔직히 춤 출 맛이 안 나더라. 그 이후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더니 <나미와 붐붐>이 나오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1990년도에 ‘슬픈 마네킹’ 노래가 나왔을 땐 방송국 가요 프로그램에서 2~3위에 오르면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 대마초 혐의로 구속되면서 모든 게 망가졌다.
-그럼 출소 이후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나오게 된 건가.
1992년 1년 반 만에 출소를 하고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발표했는데 2주 만에 1위를 했다. MBC 음악방송에서는 10주 동안 1위를 했다. 인기가 대단했다. 그때 MBC가 파업을 했는데, 그것만 아니었으면 아마 더 1위를 이어가지 않았을까 싶다.(웃음)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줄 알았나.
만들 때만 해도 전혀 몰랐다. 그 노래는 <탁이 준이>의 탁이와 공동작업으로 만든 노래인데, 만들 때 고생을 무척 많이 했다. 옥탑방에서 6개월 동안 김밥만 먹으면서 만들었다. 가사를 보면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는데, 사실은 우리 엄마 이야기다. 돌아가신 엄마가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보고 싶은데 흐린 기억 속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당시 인기도 인기지만 돈도 많이 벌었을 것 같다.
돈 많이 벌었다. 근데 그 돈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진 마라.(웃음)
-90년대 최고의 스타였는데, 당시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
너무 짧은 시간에 1위를 해서 그땐 뭐가 뭔지 몰랐다. 내 위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으로 하늘 무서운 줄 몰랐다. 1992년 스물 둘이었는데, 그 마인드가 서른까지 가더라. 사고를 쳐서 복귀를 하면 잘 안 풀려야 정상인데 앨범을 내면 잘 되니 고개가 안 숙여지더라. 1997년 IMF 때도 I.W.B.H라는 앨범으로 40만장이 팔렸다. 그 앨범을 7월에 발매하고 11월에 또 잡혀갔다. 그땐 진짜 정신 못 차리던 시절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하나.
당연히 후회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재즈힙합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현진영 씨와 아내 오서운 씨가 연애 초기 함께 찍은 사진(사진제공=현진영)
-누구보다 힘든 시기를 많이 겪었는데, 극복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나.
첫 번째는 아내를 만난 것이다. 만약 아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사고를 쳤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만나고 나서 감기약조차 쳐다보지 않게 되더라.(웃음) 아내는 나를 감시하면서 사랑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아역배우 출신이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일본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모든 걸 포기하고 내 옆에만 있어 준 고마운 사람이다.
-미래를 걱정하는 청춘들이 많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은 선배로서 조언의 한마디 해 달라.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있나 싶다. 많은 사람들이 생기지도 않은 일을 걱정한다고 시간을 허비한다. 그 쓸데없는 걱정을 안 하는 것부터 연습을 해야 한다. 감옥에서 그걸 배웠다. 재판을 앞두고 형량이 얼마나 나올까하는 걱정을 했더니 감옥 안이 지옥이 되더라. 그 걱정을 안 하기 시작하면서 맘이 편해졌다. 물론 다들 살면서 어려움이 있겠지만 스스로의 마음 콘트롤을 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다보면 내 꿈을 스스로 차단하는 꼴이 된다.
-올해 데뷔 28주년이다. 어떤 계획이 있나.
재즈힙합을 한 지 10년이 넘었다. 흔히 생각하기로 재즈힙합은 재즈와 힙합이 합쳐진 장르라고들 아는데 재즈힙합은 재즈의 한 장르다. 재즈신(Scene)에 실력 있는 후배들이 많은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들이 너무 많다. 재즈힙합 공연을 통해 가려져 있던 재즈 뮤지션들과 재즈힙합이라는 장르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현진영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다. 7월에 첫 공연을 시작으로 정기적으로 계획 중이다.
khm@hankyung.com
[사진=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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