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학습자를 위한 쉬운 글 씁니다” UN 퇴사하고 ‘피치마켓’ 창업한 함의영 대표

입력 2018-10-04 11:28   수정 2018-10-05 10:32




△‘피치마켓’의 함의영 대표가 발간한 도서를 들고 있다.

[캠퍼스 잡앤조이=이진호 기자/박준혁 대학생 기자]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라는 직장, 기획팀 팀장이라는 지위, 이 조건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피치마켓’의 함의영 대표는 창업을 위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직장을 과감히 그만뒀다. 

‘피치마켓’은 느린 학습자들(발달장애인, 경계선급 지적 장애인 등)을 위한 쉬운 글을 쓰는 단체다. 안정적인 직장을 관둔 그에게 닥친 것은 외로운 도전과 사람들의 회의적인 시선뿐이었다. 퇴사 후, 첫 번째 책을 출판하는 데에만 1년이 필요했다. 그 동안 자비를 투자하고, 주변인들에게 부탁을 거듭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피치마켓’은 일 년에 1500명이 넘는 느린 학습자와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며 함께 나아가고 있다. 함 대표는 앞으로 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목표도 갖고 있다. ‘피치마켓’의 함의영 대표를 직접 만났다.

-‘피치마켓’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시중에 판매하는 책 중에 느린 학습자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동도서뿐이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살아가면서 글과 책을 멀리하게 된다. ‘피치마켓’은 2015년에 설립된 비영리단체이다. 글을 이해하기 힘든 느린 학습자들이 글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읽기 쉬운 글을 쓰고 있다. 느린 학습자들이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 환경과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학교들과 협약을 맺어 특수학급 학생들의 교육 과정에도 함께 하고 있다.” 



△‘피치마켓’에서 느린 학습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독서 교육의 모습이다.

-‘피치마켓’이 무슨 뜻인가.

“경제학 용어에 레몬마켓과 피치마켓이라는 단어가 있다. 레몬마켓은 소비자가 판매자보다 제품에 대해 가진 정보가 적어서 저급품이 유통되는 시장을 말한다. 정보의 불균형 때문에 저급품이 넘쳐나게 되고, 결국은 소비자들도 외면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피치마켓은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이 물건에 대해 균등한 정보를 갖게 되어 품질이 좋은 상품들로 넘쳐나는 시장을 말한다. 정보가 평등한 피치마켓 같은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것을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쉬운 글을 통해 이루려고 했다. 평소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글들, 정보들을 쉬운 글로 써서 그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작년 19대 대통령 선거 때 느린 학습자들이 읽을 수 있는 대선 공약집을 쉬운 글로 만들었다. 대선 공약집에는 알 수 없는 표현이 정말 많다. 느린 학습자들에게는 특히나 경제 용어나 군사 용어들은 더욱 생소하고 어렵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선 공약집을 쉬운 글로 만들어서 그들이 직접 대선 공약집을 읽고 이해하고 자신들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외에도 유명한 도서, 유용한 정보들을 쉬운 글로 고쳐 쓴 책과 자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당신이 알지도 모르는 질병 이야기’, ‘발달 장애인을 위한 알기 쉬운 노동법’ 등이 있다.”

-느린 학습자를 위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대학교 때 법학을 전공하면서 우리말이지만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어렵게 쓰인 우리말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 때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과 더불어 글을 통해 세상을 바꿀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들을 잊게 됐고, 직장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다 한참 후에 예전에 가졌던 생각들을 다시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함께 글에 대한 스터디 모임을 하게 됐다. 스터디 모임을 하면서 한 멤버가 발달 장애인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멤버와 대화에서 쉽게 글을 고쳐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갖게 됐다. 그게 첫 시작이었다.”



△‘피치마켓’에서 출판한 대표 도서들.

-이전에는 어떤 직장을 다녔는가.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 기획팀 팀장으로 일했다. 직장에서는 주로 환경 개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을 했다. 남극의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를 보호하고, 아프리카에 교량을 건설하는 등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주로 진행했다.”

-직장에서의 경험이 ‘피치마켓’을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나.

“분야는 완전히 다르지만, 사업을 구상하고 진행하는 경험에 익숙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다.”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 보니 일을 진행하는 것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다.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글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혼자 모든 사업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외롭고 힘들었다. 자비를 들여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구걸하다시피 부탁하고, 적은 돈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처음으로 책을 출판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이디어의 가능성만을 믿고 퇴사까지 결정했던 나에게는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다.

또 어려웠던 것은 느린 학습자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한 번도 느린 학습자들에 대해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특수학급에서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학생으로 수업에 참가하여 함께 일 년 정도 수업을 들으면서 발달 장애인 친구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또한, 이 경험을 통해 느린 학습자들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힘든 점만큼 보람을 느낀 일도 있을 것 같다.

“이 일을 하면서 하루에 한두 번씩은 좋은 피드백을 받게 된다. 그것이 나의 동기부여가 된다.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함께 공부한 지적 장애인분이 40년 만에 처음으로 책을 온전히 읽게 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에서 변화를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큰 보람을 느꼈다. 단순히 우리가 그들을 바꿔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방법을 찾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좋았다.”



△‘피치마켓’에서 출판한 대표 도서들.


-대학생들과도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생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시작하게 된 장기적인 목표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쓸 때, 무의식적으로 어려운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게 된다. 계속해서 그렇게 된다면 느린 학습자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은 오직 ‘피치마켓’에서 만든 글뿐일 것이다. 글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글을 쓰는 방식이 더욱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보고 싶었다. 또 하나는 쉬운 글을 쓰다 보면 정보를 다루는 것과 그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수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와 함께하는 대학생들도 그것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단순히 함께 쉬운 글을 쓰는 것 이외에 그들에게도 많은 공부가 될 것이다. 그렇게 ‘피치마켓’과 함께 대학생들도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앞으로의 목표는.

“‘피치마켓’을 설립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1년에 1500명 정도와 함께 독서교육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서울 지역에서만 진행되고 있다. 전국적으로도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독서, 교육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또한, 더욱 길게 보자면 지금 국내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다른 국가에서도 펼쳐보고 싶다. 하나의 국제기구로서 더 많은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그저 먼 목표만 바라보다 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게 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나는 대학생활 동안 먼 미래의 목표에 대해서만 생각하다가 어느새 취직할 때가 되어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생각했었던 목표들은 어느새 잊어버렸다. 대학생활, 젊은 시기는 금방 지나가기 마련이다. 너무 깊은 고민과 걱정을 제쳐놓고 작게나마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jinho23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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