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뻔선-뻔후’ 문화, 고려대 '학번 초기화' 사태로 '뻥선' 전락 위기

입력 2020-03-20 11:55   수정 2020-03-24 10:36


[캠퍼스 잡앤조이=김지민 기자/고도희 대학생 기자] 코로나19 확산 우려에 따라 미리 배움터, 새내기 새로배움터 등 각종 신입생 행사가 잇달아 취소됐다. 캠퍼스의 낭만을 누리지도 못한 채 동영상 강의만으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20학번 새내기들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고려대 신입생들은 학교 특유의 ‘뻔선-뻔후’ 문화 덕분에 이러한 걱정을 덜 수 있게 됐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이성현(19) 씨는 “새터와 OT가 모두 취소돼 기본적인 정보를 구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뻔선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시간표 짜는 법, 수강 신청하는 법 등을 알려준 뻔선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각종 행사의 연이은 취소로 새내기들이 뻔선에게 많이 의지하는 분위기다. (사진=고려대 에브리타임)







‘뻔선’, ‘뻔후’란 무엇인가

‘뻔선’, ‘뻔후’는 고대생들만의 은어로 본인과 학번이 같은 1년 선배와 후배를 의미한다. ‘뻔’은 ‘학번’의 ‘번’을 세게 발음한 것이다. 뻔선-뻔후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학번 10자리 숫자 중 입학 연도를 나타내는 앞의 4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숫자가 모두 동일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19240001학번 학생의 뻔선은 2018240001, 뻔후는 2020240001이라는 학번을 갖고 있다. 같은 논리로 ‘뻔뻔선, 뻔뻔후’(2년 선후배)라는 말도 있지만 ‘뻔뻔뻔선, 뻔뻔뻔후’(3년 선후배) 이상은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선물을 주고받고, 전공 서적과 시험 족보를 물려주는 등 뻔선과 뻔후가 서로를 챙기는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재학생 조유선(22) 씨는 “고학번 선배들과도 정기적으로 만나 술자리를 갖곤 한다”라며 돈독한 관계를 자랑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학번은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 때문에 교내 커뮤니티에서 고려대 출신 유명인사의 뻔후를 찾는 장난스러운 게시물도 종종 보인다.



△(왼쪽)14학번부터 19학번까지 초대된 단체 카톡방. (사진 제공=조유선 씨) 

(오른쪽)이명박 전 대통령의 뻔후를 찾는 글이 올라와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고려대 에브리타임 캡처.









사상 초유의 ‘학번 초기화’ 위기… 학생들 “혼란스럽다”

단순히 학번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생기는 이러한 유대감은 고려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이에 따른 피해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학번 초기화’ 소동은 많은 학생들의 질타를 받았다. 대부분의 학과가 하루 전날인 19일에 새내기 학번을 공표했으나 학번을 재결정해야 한다는 학교 전산처 측의 늦은 공지로 혼선을 빚었다.

외국인 신입생 등록 현황에 변동이 심해 예상인원 대비 재적인원 변동이 유의미하게 있었고, 불가피하게 학번 리셋(reset)을 하게 됐다는 학교 측의 통보는 무책임했다. 신입생 이선우(20) 씨는 “갑작스럽게 뻔선이 바뀐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래도 기존 뻔선과는 계속 잘 지내고 싶다”며 당황스러운 심경을 드러냈다.



△익명의 고려대 학생은 이번 일로 뻔선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다. (사진=고려대 에브리타임)



뻥(거짓말)이라는 의미의 ‘뻥선’, ‘뻥후’ 신조어도 등장했다. (사진=고려대 에브리타임)

학교 측은 기존의 학번을 유지하기로 단 하루 만에 결정을 번복했다. 학교 측의 발표에 학생들은 ‘당황함’을 넘어 ‘황당함’에 빠졌다. 신입생 정영희(20) 씨는 “입학 전부터 전산오류가 나니 학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다”며 “많은 학우에게 피해를 줬기에 실망감도 크다”고 전했다.



△A 학과 카카오톡 공지방. (사진=고도희 대학생기자)

‘외국인 배제, 소외감 조장’ 등 단점도 존재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뻔선-뻔후 문화 자체에 대해 재고하는 학생들도 생겼다. 고려대는 국내에서 외국인 학생 수가 가장 많은 대학 중 하나다(2019년 기준 5412명). 하지만 뻔선-뻔후 문화의 외국인 참여 비율은 매우 낮다. 학생들은 뻔선이 외국인일 경우 ‘입양 가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이는 비록 학번은 다르지만 뻔후를 한 명 더 챙길 여력이 되는 한국인 선배와 뻔선 뻔후 관계를 임의로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익명을 요구한 재학생 A 씨(21)는 “일반화하기 조심스럽지만,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학우들은 뻔선-뻔후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이 문화에 관해 설명하기도 어렵고, 우리도 굳이 설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 자연스럽게 한국인 학생들 위주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뻔선이 외국인일까 걱정하는 학생들. (사진=고려대 에브리타임)

한국인 집단 안에서도 문제는 충분히 생길 수 있다. 재학생 김연서(21) 씨는 “뻔선과 친한 학생들을 보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새내기 시절에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단순한 선후배 사이일 뿐”이라며 뻔선-뻔후 문화가 지닌 병폐를 지적했다.

min50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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