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잡앤조이=김지민 기자/고도희 대학생 기자] 지금까지의 대학은 학과를 없애고 새로 만드는 일을 반복하며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발전해왔다. 하지만 이는 실용학문에 밀려 순수학문이 도외시되는 현상을 야기했다. 21세기는 순수학문 수난시대다. 전공도 불안하고, 취직도 불안한 순수학문 전공자들은 갈수록 사회에서 설자리를 잃어간다. 그리고 대학은 이미 빠른 속도로 기업화가 진행 중이다. 대학과 순수학문의 미래, 과연 안전한 걸까.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협약식’ 기념사진 촬영 당시의 모습. (사진 제공=SK하이닉스)
고려대, 2021년부터 반도체학과 및 첨단학과 신설
4월 12일 고려대는 SK하이닉스와 함께 고려대 공과대학 내 반도체공학과를 신설해 2021년부터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는 졸업 후 SK하이닉스에 취업이 보장되는 ‘채용조건형’으로, 학생들은 학비 전액과 보조금을 지원받으며 졸업 후에는 학부 성적과 인턴 활동 내용을 토대로 SK하이닉스에 채용된다.
4월 16일 교육부는 고려대 서울캠퍼스의 2021년도 첨단학과 모집단위 조정 신청을 최종 승인했다. 이로써 반도체공학과뿐만 아니라 스마트보안학부, 융합에너지공학과, 데이터공학과의 신입생 모집도 확정됐다. 이번 첨단학과 신설은 4차 산업혁명 등 급변하는 사회변화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부와 고려대의 합작이었다.
디자인조형학부 통폐합 논란에는 묵묵부답
고려대는 디자인조형학부 통폐합 논란에 대해서 여전히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조형미술전공(순수미술 중심)과 산업정보디자인전공(제품디자인 중심)으로 구성된 디자인조형학부의 조형 전공자는 무려 100명 이상이지만 교수는 한 명뿐이기 때문에 양질의 강의와 지도가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얼마 남지 않은 전임교원의 퇴임 시기는 학생들이 항상 전공 자체의 존폐를 걱정하게 만든다.
이에 조형전공 학생들은 2019년 10월 안전졸업위원회(이하 안졸위)를 구성해 조형전공의 신임 교원 채용을 요구하고, 대자보 및 연서명을 통해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안졸위의 대자보에 의하면 현재로서는 디자인조형학부 내 디자인전공(7명)보다 조형전공(1명) 교수의 수가 극도로 적어 ‘신임 교원 채용이 관철되기 어려운 환경’이며, ‘디자인 대학 승격’을 지원한다는 현 총장의 공약은 사실상 ‘학과 통폐합’을 의미한다.
△학내 커뮤니티에서 이슈가 되었던 디자인조형학부 통폐합 관련 게시글. 고려대 에브리타임 캡처.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안전졸업위원회 대자보. (사진 제공=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이에 디자인조형학부 측은 조형전공의 교원 충원이 되지 않은 이유는 교수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충원요청서가 제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디자인 대학 승격 또한 학과 통폐합과는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당시 문제 해결을 위해 디자인전공 교수와 학생 대표들이 3월 초 학부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공개 토론회를 열기로 합의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오프라인 개강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토론회 일시도, 조형학부 전공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대학의 기업화와 순수학문의 몰락
고려대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정도로 오늘날 대학의 기업화는 이미 치밀하게 발생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학계와 경제계가 유착 관계를 형성해 지식의 생산 과정을 기업의 방식으로 관리하기 시작했고, 정보화 사회의 영향으로 대학은 불가피하게 실용적인 변화를 선택하게 됐다. 대학의 ‘순수학문 죽이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특히 오늘날의 기업은 비용 절감의 측면에서 대학 졸업 후 현장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유로 문과보다는 이과를 선호하며 문과 안에서는 경영, 경제, 통계 즉 상경계열, 이과 안에서는 전기·전자, 화학공학, 기계공학, 일명 ‘전화기’로 불리는 전공자들이 비전공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취업 시장에서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경계, 전화기 전공과 그렇지 않은 전공에 대한 기업의 선호도가 갈수록 뚜렷해진 결과 학생들의 전공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경제학과에 재학중인 손유승(21) 씨는 “고등학교 때 동아리 활동을 통해 경제에 흥미를 갖게 된 측면도 있지만, 아무래도 금융 기업들의 고임금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경제학과에 진학했다”라고 말했다. 이중 전공으로 상경계, 전화기 전공을 택하는 학생들의 수도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실용학문과 달리 순수학문의 경우에는 전공 분야를 살려 취직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순수학문 전공자들조차 교수의 길을 걷지 않을 거라면 전공 분야를 살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익명을 요구한 철학과 A(21) 씨는 “꿈이 철학자가 아닌 이상 자기 진로를 직접 설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유전공학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며 “진로를 찾기 위해 휴학도 하고 이것저것 해보는 학우들이 많다”고 말했다.
△동국대 철학과 출신 사장님이 운영하는 떡볶이집. 배달의민족 ‘쏘크라테스떡볶이’ 가게 설명 캡처.
△숭실대 철학과 출신 선바(김선우). 대한민국의 유튜버이자, 트위치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다. (유튜브 영상 ‘철학과 가신다고요?’ 캡처 화면)
대학과 순수학문의 미래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통폐합 논란을 필두로 앞으로도 수많은 학과가 사라지고 생길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순수학문 위기론은 끊임없이 제기돼왔지만, 명확한 해결방법은 묘연한 상태이다. 이에 따라 기업화된 대학에서 순수학문이 몰락하고 있다는 비판도 당연히 제기되어 왔다. 대학 성립부터 학문의 근간을 차지하고 있던 순수학문이 위기에 처한 상황은 대학의 존립과도 직결된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10년 3월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김예슬 씨는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가 됐다”며 “대학답지 못한 대학을 거부하기 위해 자퇴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사진은 김예슬 씨 저서 ‘김예슬 선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에서 발췌.
2020년은 ‘김예슬 선언’ 1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우리 사회는 거듭된 대학 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신입생 지원율과 취업률이라는 양적 잣대만 더 강화해왔다.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현대의 대학은 직업인 양성학원과 다를 바가 없다며 10년 전 자퇴를 결심한 김예슬 씨의 각오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사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당장은 각광받는 분야, 유망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내년 혹은 내후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다시 순수학문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집중한다. 고려대 미디어학부에 재학 중인 이장호(21) 씨는 “요즘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기업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다”며 “모든 학문이 다 소중하기에 어느 학문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전했다.
min50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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