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잡앤조이=강홍민 기자/주수현 대학생 기자] 멜로디 자체는 괜찮은 거 같은데, ‘이것’을 듣는 걸 들킨다면 어쩐지 낯이 뜨거워질 것 같다. ‘이것’은 무엇일까. 바로 ‘숨듣명’이다. 숨듣명이란, ‘숨어서 듣는 명곡’의 줄임말로 난해한 가사와 중독적인 멜로디로 바깥에선 들을 수 없는, 숨어서 들어야만 하는 노래를 뜻한다. 그 때는 괴상해서 지나쳤던 숨듣명, 왜 지금 다시 주목받고 있을까.
△문명특급 ‘숨듣명’ 코너.
‘숨듣명’, 누구냐 넌
숨듣명은 연반인 재재가 진행하는 웹예능 문명특급에서 주력 콘텐츠로 등장하며 널리 알려지게 됐다. 숨듣명의 주된 특징은 노래 자체는 괜찮은데 유치하고 횡설수설한 가사와 콘셉트 때문에 대놓고 듣기에 어쩐지 좀 부끄럽다는 것이다. 2018년 11월에 올라온 ‘문명특급 EP 30’에 언급된 숨듣명을 살펴보면, ‘티아라-너 때문에 미쳐(2010)’, ‘제국의 아이들-마젤토브(2010)’, ‘걸스데이-여자대통령(2013)’ 등이 있다. 사람들은 이에 극히 공감하며 너도 나도 자신만의 숨듣명이 댓글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숨듣명에 대한 공론장이 펼쳐지자 문명특급은 숨듣명 대표 가수들을 게스트로 초대하는 코너를 만들기도 했다.
△다소 난해함을 자랑하는 ‘마젤토브’ 가사.
“한 번 들으면 못 빠져나와” 숨듣명 리스트
문명특급이 쏘아올린 작은 숨듣명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당시엔 “저게 뭐야”라며 비웃었던 노래들이 주목받게 되면서 때 아닌 대인기를 누리게 된 가수들이 생겨난 것. 그중 대표주자는 ‘제국의 아이들(제아)’이다.
9인조 보이그룹 제아는 ‘마젤토브’라는 노래로 2010년에 데뷔했다. 그러나 아이돌 포화 상태였던 당시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제아는 마젤토브뿐만 아니라 ‘이별드립(2010)’, ‘후유증(2012)’ 등의 숨듣명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마젤토브는 ‘그저 단지 헤프닝, 다른 사람 만나는 건 헤픈이’ 등의 미친 라임을 자랑하고, 후렴구에서 뜬금없이 월화수목금토일을 외치거나 라틴 걸과 멕시칸 걸 등을 찾는 노래다. 당시엔 ‘혼란의 결정체’라는 평이 많았으나 최근 ‘1일 1마젤토브’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자 멤버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는 근황이 전해진다. 10년간 빛을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인기를 얻게 된 마젤토브엔 ‘10년을 기다린 노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틴탑’의 ‘향수 뿌리지 마(2011)’의 가사도 주목받으며 숨듣명으로 급부상했다. 향수 뿌리지 마는 ‘향수 뿌리지 마, 이러다 여친한테 들킨단 말야’. ‘반짝이 바르지 마, 이러다 옷에 묻음 안 된단 말야’라며 당당하게 양다리를 걸치는 가사로 많은 이들을 뒷목 잡게 만들었다. 틴탑 멤버 니엘은 문명특급에 출연해 이에 대해 “데뷔 당시 어렸을 때라 몇 가지 단어만 보고 여심 저격 노래인 줄 알았다”고 해명했다. 또 “우리 노래 숨어듣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은 263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유튜브 ‘후유증’ 댓글 모음.
“학창시절 추억에 젖을 수 있어요”… 숨듣명에 푹 빠진 우리들
숨듣명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유튜브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로 ‘○○○○ 레전드 댓글 모음’ 영상의 시작이다. 주로 숨듣명 MV나 무대 영상에 달린 댓글을 모아 재미있게 편집한 것으로, 숨듣명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후유증 댓글 모음’ 시리즈는 인기가 좋아 10탄까지 나왔다. 이중엔 320만 조회 수가 넘는 영상도 있고, 제아 리더 문준영과 멤버 하민우가 직접 해당 영상에 “옛날 노래 좋게 들어주셔서 감사하다. 숨어 듣지 말고 많이 들어달라”, “여러분 덕분에 10년 만에 관심을 받아본다”라며 댓글을 달기도 했다. 댓글 모음 영상은 숨듣명 베이스에 해학의 민족다운 재치 있는 댓글들까지 볼 수 있어 인기를 끄는 것으로 보인다. 후유증 댓글 모음의 경우 카메라와 낯가리는 멤버 시완과 노래의 80퍼센트를 다 부르는 동준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다.
김하정(강원대 행정학과 2)씨는 “예전에 비해 요즘 아이돌 노래는 중독성이 약한 느낌”이라며 2010년대 숨듣명을 즐겨 듣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또 지금은 워낙 아이돌이 많아서 관심이 없으면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다. 중고등학생 땐 한 명 한 명 다 외우곤 했었다”라며 “그래서 아이돌을 제일 좋아했던 그 때 그 시절 노래를 많이 듣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또한 친구들과 함께 숨듣명을 통해 그 시절 추억에 잠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숨듣명은 음악보단 '소통'이 핵심" 대중음악평론가가 숨듣명을 바라보다
이처럼 우리를 추억에 잠기게 하는 숨듣명, 대중음악평론가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대중음악평론가이자 대중음악 웹진 IZM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김도헌(27)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 편집장은 그 시절 노래들에 대해 "2000년대, 2010년대 K-POP은 대중음악계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고, 사실상 가요계를 지탱했다"라며 "현재처럼 고도화되고 산업적으로 기틀이 잡혀 있지 않아 곡의 완성도도 천차만별이었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기획이 가능했다"라고 해석했다. 이어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낯설고 조악하게 들리는 노래들이, 독특한 가사와 퍼포먼스 등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부여하는 것"이라며 최근 숨듣명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김 편집장은 유튜브 등에서 집단적으로 숨듣명을 즐기는 현상에 대해선 "과거 가수들이 다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긍정적 효과"라는 평을 남겼다. 당대엔 혹평을 받았던 노래들이 '시간이 지나 들어보니 좋았다'라는 반전의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편집장은 "모두 함께 숨듣명을 즐기는 현상은 음악보다는 '소통'에 그 핵심이 있다고 본다"라며 "이는 유튜브 플랫폼에서 댓글 등으로 소통하는 일종의 놀이 문화"라고 말했다. 이어 "많은 이들의 공통분모를 이끌어내야 하기에 콘텐츠는 '현재의 것'이 아닌 '과거의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복고, 레트로 등은 지금보다 더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도헌 편집장은 "좋은 음악이라면 '숨어서 들을' 필요가 없다. 당시 유행하지 않았고, 혹평을 받았더라도 나에겐 너무 좋은 노래였다면 그 개인에겐 숨듣명이 되는 것"이라며 "현재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숨듣명 현상을 나쁘게 보고 있진 않다"라고 밝혔다. 이어 "덕분에 오히려 카라의 'Rock U'나 동방신기의 'HUG' 같은 2000년대 중후반 노래들을 더 듣게 됐다"라는 입장을 전했다.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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