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잡앤조이=이진이 기자/정예은 대학생 기자] 1989년 평양을 방문했던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통일국어사전을 편찬하기로 한 뒤, 16년이 지난 2005년 남과 북은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 위원회’를 결성했다. 본격적인 남과 북의 언어통합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2015년 12월 이후 남북의 공동회의가 중단된 상태다. 그럼에도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 끝에 결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남과 북이 합의한 12만5000개의 어휘와 아직 합의되지 않은 18만 2000개 어휘를 모두 모은 ‘겨레말큰사전’의 가제본 완성을 앞뒀다. 이 가제본은 추후 남북공동회의가 열릴 시 북측과 협의하는 기간을 단축하고 사전 편찬에 속도를 내기 위한 용도로 활용할 예정이다. 편찬회는 완성본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에 의거한 공식 활동 기한인 2022년 4월까지 출간하겠다는 포부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됐고,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해 38선이 그어졌다. 처음에는 단순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세계 적화의 꿈을 가지고 있던 소련에 의해 정치적 분계선으로 변질되며 하나였던 금수강산은 남과 북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이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의 합의로 휴전협정이 체결돼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는 다른 국가가 됐다.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단독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됐고, 같은 해 8월 15일 선출된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948년 9월, 북한에서도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명칭의 별도의 국가가 설립됐다. 하나였던 우리민족이 국가의 이름도, 수장도, 정치적 체계도 모두 다른 완전히 별개의 나라가 된 것이다.
남과 북, '다른 나라 다른 언어'
올해로 75주년을 맞은 남북분단의 역사는 그 긴 세월만큼 남과 북의 좁혀지지 않는 차이를 만들어냈다. 정치·경제적인 체계뿐만 아니라 소통의 기반이 되는 언어마저 달라졌다. 원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민족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만큼 남북의 언어 사이에는 큰 간극이 생겼다. 외래어와 외국어의 사용이 활발한 남한의 언어와는 달리 북한은 고유어를 중심으로 한 언어체계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사용 어휘뿐만 아니라 문법적인 체계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일부 ‘ㄴ’과 ‘ㄹ’이 어두에 올 때는 두음법칙에 의해 ‘ㅇ’으로 발음되는 남한과 달리 북한은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아 그대로 발음한다. 남한은 의존명사와 보조용언을 모두 띄어 쓰지만, 북한은 의존명사와 보조용언을 붙여 쓰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달라진 언어는 남과 북의 소통을 막았다. 언어적 소통이 막히니 서로 문화도 달라졌다. 말도, 문화도 모든 게 달라지니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럼에도 남과 북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기보다는 그 차이에서 오는 다름을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겨레말큰사전, 달라진 말과 글을 다시 통합하다
1980년대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기 전까지는 언어의 간극을 해소하고 언어를 바탕으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1989년 평양을 방문했던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통일국어사전을 편찬하기로 한 뒤로 16년이 지난 2005년 2월 20일 남과 북의 편찬위원들이 금강산에서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 위원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남과 북의 언어통합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후 한반도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평화, 번영’의 체계를 구축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이하 편찬회)가 정식 출범했다. 편찬회는 남과 북의 언어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중국의 연변인이 사용하는 해외동포들의 언어를 모두 모은 우리민족 최초의 공동사전의 편찬을 위해 남과 북, 해외지역의 우리말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사전에 등재되지 못했던 지역어와 문화어까지 광범위하게 올림말로 수록하는 이 사전은 남과 북의 성실한 합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제25차 공동회의의 모습.
남과 북의 언어학자들이 모여 남한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 수록된 올림말 중 23만여 개의 어휘와 새로 발굴한 10만여 개의 올림말을 선정한 뒤에 새 어휘를 조사해 집필 단계에 들어간다. 남북이 각각 집필한 원고를 교류하며 검토과정을 거친 뒤에는 남북의 형태 표기 전문가들이 모여 국어의 문법 규칙에 따라 사전을 가다듬는 작업을 통해 사전으로서의 형태를 갖춘다. 교정을 끝낸 원고들은 남북의 언어학자들과 편찬위원들이 모여 공동으로 개최하는 공동회의에서 사전 등재 여부가 확정된다. 그런데 공동회의가 지난 2015년 12월 이후로 중단된 상태다.
윤석정 편찬회 기획홍보부장은 “겨레말큰사전은 남북의 언어학자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으로 편찬해내는 사전이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그래서 편찬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측과의 소통, 합의다. 그런데 소통을 하고 합의를 이뤄낼 수 있는 시간인 공동회의가 지난 2015년 12월에 열렸던 25차 회의를 끝으로 멈춰있는 상태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서로 안부조차 물을 수 없는 상태가 돼서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편찬은 계속된다
남과 북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 남과 북이 합의한 12만5000개의 어휘와 아직 합의되지 않은 18만 2000개 어휘를 모두 모은 겨레말큰사전 가제본의 완성을 앞두고 있다. 아직 대중에 공개되는 버전의 정식 사전은 아니지만 정식 사전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북한과의 합의만 있으면 출간이 가능한 상태의 초본이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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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정 기획홍보부장은 “처음 목표로 했던 30만여 개의 어휘를 모두 담은 가제본의 완성을 앞두고 있다. 편찬회에서 교정위원들이 교정작업도 진행하고 있고 진짜 사전처럼 공식적인 형태를 갖춰서 제작 중이다. 하지만 아직 북측과의 용례나 표기법에 대한 합의가 끝나지 않아 대중에 공개되지는 않을 예정이다. 완성본의 경우는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에 의거한 공식 활동 기한인 2022년 4월 전까지는 출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남과 북의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도 남과 북의 언어를 하나로 통합하는 사업이 계속 진행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언어의 통합을 통한 민족 동질성의 회복에서 찾는다.
윤석정 부장 역시 “남북이 분단된 75년의 시간 동안 언어 또한 분단 됐기 때문에 언어가 제대로 흐를 수 없었다. 그런데 언어는 모든 것의 기본이 된다. 서로의 언어를 알아야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모든 일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흐름이 끊겨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언어의 간극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에 편찬사업의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10월 14일~18일 청주서 겨레말큰사전 홍보관 열려
편찬회는 그동안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서 겨레말큰사전의 의의와 남과 북의 언어통합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겨레말큰사전 홍보관’을 운영해왔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해 지난 2월, 시민청의 운영이 잠정적으로 중단되면서 시민들에게 공개되던 편찬회의 홍보관 역시 운영이 중단됐다. 그동안 잠시 우리 곁을 떠나 있었던 겨레말큰사전 홍보관이 오는 14일부터 18일까지 청주에 위치한 전시공간인 동부창고에 열린다. ‘글로 쓴 평화’를 주제로 열리는 2020전국문학인대회의 특별전시로 겨레말큰사전 홍보관이 돌아온다.
△겨레말큰사전 홍보관.
윤 부장은 “방역 수칙을 준수하면서 지역주민들이나 학생들에게 홍보관을 개방할 예정이다. 홍보관을 통해 시민들에게 우리가 편찬하려고 하는 겨레말큰사전에 대해서 알리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며 겨레말큰사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zinyso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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