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잡앤조이=이진이 기자/조민지 대학생 기자] 가스라이팅은 ‘가스등’(Gas Light·1938)이라는 연극에서 비롯된 용어다. 극 중 그레고리는 폴라를 자의적 판단에 의해 정신이상자로 몰아가거나 외출을 막는 등 폴라를 정신적으로 통제하려 한다. 폴라는 점차 자신을 의심하게 되고 판단력이 낮아지면서 그레고리에게 의존하게 된다.
△영화 ‘가스등’ 스틸컷.
한 마디로 개인이 타인을 알게 모르게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해 상대방의 자아를 무력화시키는 현상이 가스라이팅이다. 여러 인간관계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편이지만 일종의 정신적 세뇌인 만큼 피해자가 알아채기도 쉽지 않은 폭력이다.
연인 간 초기 가스라이팅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대사가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이 정도 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다리 드러나는 옷 입지 말라고 했지!” “너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내가 그렇게 하는 것 싫다고 했잖아” 같은 유형이 있다.
이것이 심화하면 “너는 나 아니면 아무도 만날 수 없을 거야”라는 말을 반복해서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무력하게 만들거나 “네 주변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만 하니까 누구의 말도 믿지마”라고 세뇌함으로써 피해자가 외부에서 객관적인 조언을 들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가해자가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 역시 가스라이팅에 속한다. “왜 날 자꾸 자극하는 거야?” “그러니까 날 화나게 만들지 말랬잖아!” 등의 심리적 폭력도 명백한 데이트폭력이다.
가스라이팅에 노출된 피해자는 갈수록 자기 자신의 판단력과 인지능력, 현실감각 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은 가해자에 대한 의존도를 한층 더 높이며, 당연히 학대 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더욱더 멀어진다. 궁극적으로 피해자는 자존감을 상실한 채 ‘가해자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자책감과 죄의식의 늪으로 빠져들기 일쑤다.
영미권에서는 수십 년 간 가정 폭력을 당한 아내의 살해 동기가 분노가 아닌 공포임을 헤아려 정당방위의 토양을 갖춰졌지만 우리는 반의사 불벌죄로 인해 가해자인 남편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 경찰에서 가정폭력 사건을 입력할 때 부부라는 항목 없이 두루뭉술하게 하는 것 자체가 아내를 남편의 부속물, 소유물로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정희진 여성학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해자’가 변하는 경우는 없다. 있다면 두 가지 경우인데, 하나는 사회로부터 영원한 격리이고, 또 하나는 ‘피해자’의 대응이 이전과 달라졌을 때다. 가해자가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고 가부장제 문화는 대부분 그들을 방관하거나 지지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학대 그 자체다. 가해자에 대한 의문과 불필요한 관심은 트라우마를 가중시킬 뿐이다. 문제는 ‘피해자’의 학습된 무기력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학습된 희망이다. 학대와 폭력에 관한 가장 정확한 개념은 “그 남자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변하지 않는 학대자에 맞서 학대를 줄이거나 멈추려고 노력해도 결국엔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피해자는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포기하는 단계에 이른다. 실제로 데이트폭력 피해 여성의 절반 정도가 폭력 가해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은 데이트폭력 경험자 중 절반에 가까운 45.0%가 데이트폭력 상대와 결혼했고, 남성도 데이트폭력 경험자 중 32.4%가 상대와 결혼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고서는 “한국 사회에서는 데이트폭력을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인 문제로 다뤄온 경향이 컸다”라며 “따라서 데이트폭력은 사회적 문제이고 젠더 폭력이라는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며, 데이트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가스라이팅 자가진단표.
사랑하는 사이라는 이유로 데이트폭력을 간과하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근절되지 않은 채 결혼하면 가정폭력으로, 부부간의 폭력은 아동학대로도 이어질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익숙해져서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데이트폭력이 될 수 있다. 불안감은 위험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으므로, 자가진단표를 통해 확인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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