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중반 열기를 달구기 시작했던 지난해 11월 하순, 안철수 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부산 유세에 나섰을 때다. 그가 연단에 오르자 젊은 지지자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연신 박수를 쳤다.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한 대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반값 등록금을 언제부터 시작할 겁니까?” “임기 5년 내에 시행할 것”이라고 하자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급랭했다. ‘당선하면 취임 즉시’라는 답을 기대했는데, 빗나간 탓이었다. 안 전 원장 지지를 공개선언하고 유세에 동참했던 한 ‘스타’ 대학 교수는 “이후로는 연설 내내 단 한 차례도 박수가 터져나오지 않았고,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려 당혹스러웠다”고 전했다.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나드는 나라에서 ‘반값 등록금’이 얼마나 화급한 정치이슈였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단면이다.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특별기구로 즉각 청년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위원장을 맡은 김상민 의원이 “새 정부의 가장 시급한 청년정책은 반값 등록금”이라고 강조한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교육정책의 '큰 틀'이 궁금하다
“그 많은 재원(財源)을 어떻게 조달할 건가”는 이미 숱하게 제기돼 온 문제다. 올해 정부가 국가장학금으로 편성한 예산만 2조750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다 대학들 자체적으로도 장학금을 늘리고 등록금을 인하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교수의 임금과 연구비 감액이 불가피해졌다. 대학들이 “교육의 질 저하를 어쩌란 말이냐”며 속앓이를 하는 이유다.
그보다 앞서 따져봐야 할 게 있다. 교육정책의 큰 틀에 관한 문제다. 박 당선인은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전문계 고등학교 교육 활성화와 취업문호 확대를 약속했다. 바람직한 조치다. 넘쳐나는 ‘대졸 백수’들이 일자리를 찾다 못해 높은 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위 공무원직으로까지 몰려드는 판이다. 그런 판에 ‘반값 등록금’은 청소년들에게 헷갈리는 신호를 줄 게 뻔하다. 그런데도 ‘반값’을 강행하겠다면, 최소한 과잉 난립해 있는 대학들에 대한 구조조정 원칙부터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밝히는 게 순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실책'
‘수익자’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도 문제다. 박 당선인은 공약에서 소득기준 상위 20%를 제외한 전체의 80%에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등록금이 해결된다고 해서 극빈계층의 젊은이들까지 대학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이라도 당장 부여잡아야 할 판에, 대학 진학은 사치일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생활환경의 젊은이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복지 재원을 ‘표(票)의 논리’에 밀려 남용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딱부러지는 설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박 당선인이 역할모델로 꼽은 엘리자베스 1세 전 영국여왕(1533~1603)은 계층 간 대립으로 사분오열돼 있던 당시 사회를 탕평하고, 영국의 ‘황금시대’를 연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에게도 ‘옥에 티’가 있다. 양말을 짜는 편물기계를 개발, 특허를 신청한 발명가에게 “그대의 발명품은 가엾은 백성의 일자리를 모조리 빼앗고 말 것”이라며 퇴짜를 놓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이 결정을 자신의 권력기반이었던 백성의 눈치를 살핀 결과로, 혁신 의욕을 꺾어 산업혁명을 200년 가까이 늦춘 요인으로 꼽고 있다. ‘권력 기반’에 포획당하고 타협하는 정치의 후과(後果)가 걱정스런 이유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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