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경조금 부담

입력 2013-01-04 16:59   수정 2013-01-05 06:12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존경과 신뢰로 서로의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부디 왕림하셔서 저희들의 출발을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넉넉지 않은 생활비로 빠듯하게 살아가다 청첩장을 받아들면 더럭 겁부터 난다. 봄 가을 결혼시즌 청첩장이 몇 장씩 쌓인 터에 친척이나 직장 동료들의 부고까지 겹치면 절로 한숨이 나오기 마련이다.

대체 봉투에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부터 간단치 않다. 경조금에는 계량화하기 어려운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친분과 체면, 과거에 받은 액수, 상대방의 지위 따위가 영향을 미친다. 언제 어느때 누구에게 얼마의 경조금을 내고 받았는지 꼼꼼하게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에 따라 액수를 정하기 위해서다.

경조금은 어렵게 살던 시절 쌈짓돈을 품앗이해 혼주나 상주의 짐을 덜어주는 미풍양속이었다. 같은 부조(扶助)문화권인 중국의 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조차 ‘조선사람들이 갖고 있는 뜨거운 마음의 표시’라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서로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작년 말 한 취업포털사이트가 직장인 497명에게 물었더니 한 달 평균 1.7건의 경조사에 참석해 11만원을 지출하고 있으며, 80% 정도가 ‘비용이 부담된다’는 의견을 보였다. 더구나 갑(甲) 위치의 인물이 경조사를 당하면 ‘인사’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을(乙)의 입장으로는 나중에 돌려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부조가 아니라 뜯기는 돈이다. 액수도 수십만원으로 올라가는 게 보통이다.

LG그룹이 이런 폐해를 줄이려고 임직원이 협력사 직원 등 업무 관련자에게 경조금을 일절 받지 못하도록 하는 윤리규범을 발표했다. 그동안 5만원 이상은 신고 후에, 5만원 이내는 신고 없이 받는 것을 허용했지만 앞으로는 금액에 상관없이 모두 금지하기로 했다. 사내 게시판에 임원 자녀 결혼 소식을 공지하던 관행도 중단한다. 마침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도 ‘공무원이 별 친분 없는 관리감독 업체에 청첩장을 뿌려 받은 축의금은 뇌물’이란 판결을 내렸다.

경조금이 관행이라지만 서로에게 짐이 된다면 바꾸는 게 당연하다. 프랑스에는 예비 신랑 신부가 컵, 식탁보, 촛대 같은 자잘한 세간이 적힌 리스트를 미리 만들어 혼수가게에 알려주고 하객이 각자 적당한 품목을 골라 값을 치르도록 하는 풍습이 있다. 빈소 앞에 조의금 함을 놓아두고 문상객들이 성의껏 넣은 돈을 모아 고인 이름으로 기부하는 나라도 있다. 마음이 담긴 게 아니라 세금 고지서 같은 경조금이라면 없애는 게 낫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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