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중앙은행이 독립성 잃으면 경제안정 해쳐"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들이 경쟁적으로 양적완화에 나서고 있다. 양적완화란 돈을 찍어내는 발권력이 있는 중앙은행이 돈을 시중에 푸는 것을 말한다. 주로 정부 국채를 매입해 시중에 돈을 푸는 방법이 동원되지만 기타 다른 금융자산을 사들여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기도 한다.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를 하는 이유는 대부분 경기부양이다. 금리인하 등으로도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으면 시중에 유통되는 돈 자체를 늘려 다소 물가가 오르더라도 경제에 활력을 넣으려는 것이다. 양적완화는 통화가치 하락으로도 이어져 수출에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과연 양적완화를 포함해 적극적으로 경기부양책을 쓰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것이다.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당초 목적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중앙은행도 경제안정 책임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반론도 있다. 중앙은행의 경기부양 정책을 둘러싼 찬반 양론을 알아본다.
찬성
양적완화에 대한 대표적 옹호자는 현 미국연방은행(Fed) 의장인 벤 버냉키다. ‘헬리콥터 벤’이라는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그는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중앙은행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이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Fed가 이미 3차에 걸쳐 양적완화에 나선 것은 이런 그의 신념에서 비롯됐다. Fed는 단순한 양적완화에 더해 최근에는 실업률까지 목표로 제시했다. 현재 연 0~0.25%로 사실상 제로 수준인 미국의 기준금리를 실업률이 6.5% 밑으로 내려갈 때까지 사실상 항구적으로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제로금리를 특정 실업률과 연계해 지속적으로 유지하겠다는 것은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을 넘어 경기 살리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최근 열린 미국 경제학회에 참석한 애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버냉키 의장이 헨리 폴슨 재무장관의 전화를 받길 거부했다면 그건 바보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앙은행과 재무부가 협력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또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며 Fed의 적극적 개입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UC버클리의 데이비드 로머와 크리스티나 로머 교수도 “Fed가 1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른 때는 통화정책이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무 정책도 내놓지 않다가 대공황과 스태그플레이션을 야기한 1930년대와 1970년대”라며 Fed의 적극적인 경기부양을 지지했다.
반대
중앙은행의 경기부양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중앙은행이 정치 내지는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면 물가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통화정책이 독립성을 잃으면 거시경제 안정화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올해 미국 경제학회에 참석했던 앨런 멜처 카네기멜론대 교수는 “헌법상 통화정책의 권한은 의회에 있다. 중앙은행은 대리인일 뿐이다. 누가 Fed에 의회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많은 돈을 풀 재량권을 줬냐”며 “Fed가 너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데 돈을 찍어내는 것으로는 구조적 문제 해결이 안된다”고 강조했다. 제임스 블라드 세인트루이스 Fed 총재도 “정치적 협상이 필요한 세입·세출 등 재정정책은 거시경제 충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중앙은행에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며 “통화정책이 독립성을 잃으면 거시경제 안정화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통화정책의 재정정책화, 정치화는 거시경제 정책의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다.
존 테일러 스탠퍼드대 교수는 “Fed는 금융위기 이후 스스로 정치적 독립성을 포기했다”면서 “입법을 통해 구체적인 준칙을 마련하는 것이 독립성을 복원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중앙은행이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본래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생각하기
중앙은행 본래의 역할은 누가 뭐래도 통화가치 내지는 물가 안정이다. 하지만 요즘 상당수 중앙은행들은 경쟁적인 양적완화에서 보듯이 사실상 정책금융 기관화되고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한편에서는 중앙은행 기능의 진화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중앙은행의 타락 내지 변질로 간주한다.
사실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도 결국은 한 나라의 경제안정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반드시 통화가치 안정에 국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중앙은행의 개입이 경기를 살린다는 보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양적완화를 하거나 금리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는 있다. 하지만 ‘유동성 함정’에서 보듯이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저금리 정책을 펴고 시중에 유동성이 풍부해도 경제는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풍부한 자금이 기업의 생산이나 투자로 몰리지 않고 소비 역시 늘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경우 풍부한 유동성은 주식이나 부동산 등 비생산적인 자산에 몰려 가격 거품을 발생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2008년 금융위기 역시 이런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중앙은행의 개입은 경기는 살리지도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갑작스런 거품 붕괴로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줄 수도 있다.
최근 이와 비슷한 양상이 재연되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 빠져나온 돈이 한국 중국 브라질 등 신흥국으로 돈이 몰리면서 환율이 불안해지고 일부 자산가격도 들썩이는 게 대표적이다. 반면 정작 양적완화 당사국들의 경기는 크게 살아날 조짐도 없다. 양적완화가 포퓰리즘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물론 그나마 양적완화가 글로벌 경기의 급격 위축을 막는다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중앙은행의 역할, 그리고 통화정책의 목표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연구가 국내에서도 활발해져야 하겠다.
김선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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