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 있는 곳에 얘기해야 요구사항 제대로 전달된다"
1인 피켓 시위자 대거 몰려
차도까지 내려오다…경찰과 몸싸움 벌이기도
지난 9일 오전 11시10분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인수위)가 들어선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정문 앞. 이곳에선 민주노총 금속노조원과 경찰 20여명이 고성 속에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경찰은 차도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건 허용할 수 없다며 노조의 기자회견장 앞에 ‘경찰통제선’을 설치했고, 노조원들은 통제선을 밀어내면서 “합법적인 기자회견”이라고 거세게 항의했다. 경찰 관계자는 “인수위 업무가 시작된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같은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푸념했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요구를 관철하려는 목적으로 벌어지는 각종 집회와 시위 지도가 바뀌고 있다. 가두시위를 동반한 대형집회가 여론의 외면을 받으면서 정치·사회적 상징성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단골 집회장소였던 시청 앞 서울광장이나 서울역광장이 지고 자투리공간이더라도 메시지 전달력이 확실한 ‘맞춤형 장소’가 시위지로 뜨고 있다. 인수위 앞이 용광로 같은 열기를 내뿜는 대표적인 시위현장으로 변한 반면 관심권 밖 벽지격인 세종시에선 시위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해 들어 가장 뜨거운 시위 장소는 인수위가 자리잡은 금융연수원 앞. 시민단체와 각종 이익단체의 기자회견과 1인 피켓 시위로 연일 시끄럽다. 이곳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정부 인수위원에게 ‘신문고’를 울리는 장소가 된 셈이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7일부터 11일까지 한 주일 동안 금융원수원 앞에서 열린 1인 시위와 기자회견은 모두 53차례, 하루 평균 10건 이상 열렸다. 금융연수원 사무실뿐만 아니다. 박 당선인 집무실이 있는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에서도 철거민단체 회원 등 10여명이 매일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집회·시위란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청원하는 것인 만큼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집회를 하려는 것”이라며 “권력 이동에 따라 집회 장소도 바뀌는 모습을 보인다”고 진단했다.
○5년마다 인수위 앞 장사진 … 청와대 앞 썰렁
인수위 사무실 앞에선 대규모 집회 대신 기자회견이 주로 열린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인수위가 위치한 금융연수원은 총리공관과 거리가 100m 이내이기 때문에 옥외 집회나 대규모 시위가 불가능하다. 대규모 집회가 법으로 금지되자 차선책으로 경찰에 사전 신고할 필요가 없는 기자회견이나 피켓을 든 1인 시위대가 몰려든다.
1인 시위대는 인수위원의 출근 시간인 오전 8시를 전후해 가장 많이 몰린다. 인수위 앞에는 유성기업과 풍산마이크로텍, 만도, 보쉬의 노조 관계자와 학교 비정규직 노조 관계자 등 약 15명이 인도에 줄지어 서서 현안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주된 요구사항은 ‘해고자 복직’이다. 정연홍 풍산마이크로텍 노조원(50)은 “지난 6일부터 1인 시위 장소를 서울 공덕동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인수위가 있는) 금융연수원 앞으로 옮겨 왔다”며 “사회대통합을 외친 박 당선인이 해고자들의 목소리도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인수위 활동이 끝나는 2월 말까지 이들의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 행렬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경찰은 특히 인수위원의 안전을 고려, 집회 경비 전담인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54기동대원 30여명을 상시 배치하고 있다.
5년 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당시에도 금융연수원 주변은 각종 기자회견과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겉 풍경은 5년 전이나 비슷하지만 시위대의 요구사항이 달라진 것이 차이점이다. 올해 인수위 주변엔 부당하게 해고당했다며 복직을 요구하는 노조원들이 주로 몰려든 반면 2008년엔 이명박 당선인이 정부조직을 개편한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통·폐합 대상으로 거론된 부처 관련 시위가 많았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최근의 집회·시위는 대부분 이해 당사자가 아니면 별다른 관심도, 시위 효과도 없다”며 “문제 해결의 주체를 따라 시위대가 찾아가는 경향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찾아가는 집회 대세…‘민폐성 집회’는 외면
인수위 앞이 성황을 이루면서 이전에 대규모 집회나 1인 시위가 주로 열렸던 장소는 썰렁해졌다. 11일 ‘1인 시위 1번지’인 국회 정문과 청와대,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은 사진을 찍는 관광객과 순찰근무 중인 경찰들 외에 시위대는 보이지 않았다. 대규모 집회·시위의 단골 장소인 서울역광장과 시청 앞 서울광장에선 올 들어 단 한 건의 집회도 열리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이 입수한 최근 3년(2009년 7월~2012년 6월) 동안 서울에서 집회가 많이 열렸던 장소 ‘톱10’을 보면 △삼선동 성북구청 앞(670건, 2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 앞(336건, 4위) △지하철 2·7호선 건대입구역 앞(168건, 6위) △홈플러스 면목점 앞(88건, 7위) △신내동 중랑구청 앞(48건, 7위) △지하철 1호선 회기역(24건, 10위) 등으로 시위대가 직접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더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갔다. 집회가 서울 시내에서 두 번째로 많이 일어난 성북구청 앞은 성북구 청소용역업체에 소속된 청소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촉구 집회가 대다수였다. 6위인 건대입구역에선 인근 노점상들이 구청의 철거 계획에 반대하는 집회가 주로 열리는 등 대부분 당사자들이 직접 맞부딪칠 수 있는 ‘맞춤형 집회’가 열렸다. 1위를 차지한 종묘광장공원(771건)은 집회라기보다는 보수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매일 공원에 있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안보토론회를 연 것이어서 성격이 다른 집회였다.
○총리실 이전했지만 세종시 집회는 ‘시들’
시위대로 붐비는 정부중앙청사와 달리 세종특별자치시로 이전한 국무총리실 앞은 아직 ‘썰렁한’ 편이다. 지난달 15일 총리실이 이전했지만 아직 항의성 집회나 시위는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건설노동조합이 세종시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임금이 체불된 일부 조합원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작년 11월13일부터 지난 18일까지 집회신고를 하긴 했지만 실제로 집회를 열지는 않았다.
세종시가 집회 명소로 부상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총리실을 시작으로 기획재정·환경·국토해양부를 비롯한 1실·2위원회·9부2처·2청 등 16개 중앙행정기관과 20개 소속기관이 순차적으로 이전하고 있지만 아직 교육과학기술부 등 대표적인 민원성 부처가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부중앙청사를 관할하는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총리실, 재정부, 환경부, 국토부 외에 교과부나 통일부를 상대로 한 집회를 하던 이익단체들이 따라내려가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부처가 내려가지 않는 이상 정부의 상징인 총리실이 내려왔다는 이유만으로 시위대가 몰려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김우섭/이지훈/김선주/박상익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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