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독감이 발병한 1918년만 해도 사람들은 감기와 독감의 차이를 잘 몰랐다. 그해 5월 프랑스 주둔 미군부대에서 감기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이 급증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6월엔 스페인에서 수백만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프랑스인들은 ‘스페인 감기’, 스페인인들은 ‘프랑스 감기’라 불렀다. 여름이 끝날 무렵엔 독일을 덮쳐 4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국에서도 50만명이 희생됐다.
한반도도 무사하지 못했다. 불과 4개월간 740여만명이 감염돼 14만 명이 숨졌다. 이른바 ‘무오년 독감’이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도 감염돼 독감을 앓았다. 스페인 독감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심지어 북극과 태평양 섬까지 퍼졌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2500만명 넘게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나 1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셈이다.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1933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분리됐다. 지금까지 세 가지 유형이 발견됐다. 전염속도가 빠르고 증상도 심각한 A형(고병원성), A형보다 증세가 약하며 주로 봄철에 나타나는 B형(약병원성), 전염률이 낮고 증상도 가벼운 C형(비병원성) 등이다. 문제가 되는 건 주로 A형이다. 감기와 달리 고열, 전신근육통, 심한 피로를 일으키고 회복 기간도 2~3주로 길다. 독감 자체에 의한 사망률은 높지 않으나 2차 감염과 폐렴, 뇌염, 심근염 같은 합병증이 생기면 치사율이 쑥 올라간다.
독감 치료가 어려운 건 바이러스 형태가 다양하고 변이가 심하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는 130여가지의 조합이 가능하다. 돼지나 조류에 침투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 전염된 후 변이를 일으켜 인간 사이에 전파되기도 한다. 특효약은 없다. 백신 접종으로 60%쯤 예방된다지만 계속 변종이 나타나는 탓에 다시 새로운 백신을 개발해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전역에 독감이 퍼지며 사망자가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2009년 유행했던 인플루엔자의 재조합에 의한 변종이란다. 전문가들은 특별히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으나 2개월 내에 20만명 이상 감염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독감이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병원 방문환자 1000명당 독감 환자수가 3주 전 2.8명, 2주 전 3.3명, 1주 전 3.7명으로 증가해 유행주 수준(1000명당 4명)에 근접했단다.
지금이라도 백신을 맞으면 도움이 된다니 노약자나 임산부는 예방접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참에 흐르는 물에 손 자주 씻기 같은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독감은 앞으로도 변신을 거듭하며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따라다닐 테니 말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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