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1802~1885년)는 17년간 집필한 소설 ‘레미제라블’을 1862년 출간하며 서문에 “이 지상에서 무지와 가난이 존재하는 한 이 같은 성격의 책들이 무용지물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위고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난 지난해 말부터 영화와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장르로 다시 등장한 ‘레미제라블’은 큰 인기를 얻으며 한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레미제라블'에 빠진 대한민국
‘레미제라블’ 열풍의 진원지는 지난해 12월19일 개봉한 휴 잭맨 주연의 뮤지컬 영화다. 개봉 한 달 만에 전국 관객 500만명을 돌파했다. 국내 뮤지컬 영화 역대 흥행 1위였던 2008년 개봉작 ‘맘마미아’(455만4785명) 기록을 깼다. 이런 추세라면 600만 관객 기록을 달성해 공상과학(SF)이나 액션이 아닌 장르로는 유일하게 역대 외화 흥행 10위 안에 들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 앨범도 3만장 가까이 팔려 나갔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원작 소설을 다시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민음사와 펭귄클래식코리아가 각각 5권으로 내놓은 ‘레미제라블’은 영화 개봉 이후 20만부가 팔렸다. 경기 용인에 이어 대구에서 공연 중인 정성화 주연의 한국어 라이선스 뮤지컬도 연일 매진 행렬을 이루며 관람객 7만명을 넘어섰다. 내달 부산 공연에 이어 오늘 4월 서울에 입성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벌써부터 올해 최고 흥행작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열풍에는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도 한몫하고 있다. 김연아는 이번 시즌에 4분짜리 프리 프로그램에서 ‘레미제라블’ OST의 ‘원 데이 모어(One Day More)’, ‘온 마이 오운(On My Own)’에 맞춰 연기를 펼치고 있다.
#'세계를 울린 뮤지컬'의 파워
‘레미제라블’이 그동안 다양한 버전의 번역본은 물론 영화와 연극, 뮤지컬로도 여러 번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 이런 신드롬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레미제라블’ 신드롬의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완성도 높은 영화로 재탄생한 뮤지컬 원작의 힘을 꼽는다. 영국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가 제작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1985년 초연 이후 27년 동안 42개국에서 21개 국어로 6000회 넘게 공연됐다.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이 작품은 웅장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노래와 음악, 영국 왕립 극단 출신 연출가의 놀라운 무대 구성 등으로 19세기 초 프랑스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이 빚어낸 다양한 인물상과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민중의 모습을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세계를 울린 뮤지컬’이란 명성도 얻었다. 뮤지컬 역사상 최고 작품으로 꼽는 이들도 적지 않다. 1996년 한국 오리지널 초연 당시에도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비싼 관람료와 짧은 공연 일정 등으로 한정된 관객만이 접할 수 있었다.
매킨토시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영화는 뮤지컬의 감동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 왔다. 휴 잭맨, 앤 해서서웨이, 러셀 크로우 등 스타 배우들의 열연과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 배우를 클로즈업해 감정과 내면을 전달하는 기법 등으로 많은 사람들의 감동과 눈물을 이끌어냈다. 8000원이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입장료에 ‘대작 뮤지컬을’ 접한 관객들은 각자 느낀 감동이나 소감을 전파하고, 화제로 삼으면서 ‘레미제라블’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한국 사회의 '힐링' 수요 충족
지난해부터 한국 사회의 문화적 코드로 부상한 ‘힐링(치유)’과 감동이 필요한 시대에 관객의 정서를 강렬하게 파고든 점도 흥행의 이유로 꼽힌다. 영화는 19세기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권력의 횡포, 세상을 바꾸려는 젊은이들의 희생, 장발장이 보여주는 헌신과 사랑, 용서를 극적으로 펼쳐낸다. 이런 테마가 팍팍한 삶과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좌절과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치유의 드라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힐링 관점에서 영화가 18대 대통령 선거일에 개봉된 점을 들어 흥행 요인을 대선 정국과 연결시키는 시각도 있다. 대선에서 정권 교체 실패로 좌절감을 느낀 사람들이 ‘내일’을 노래하며 민중의 연대와 희망을 보여주는 영화의 내용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이 주는 힐링의 의미를 이런 사회적 맥락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영화와 원작의 중요한 테마는 주인공 장발장이 보여주는 ‘세상과의 화해’와 용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이유에서다.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박애, 평등이란 보편적 메시지를 수준 높은 예술적인 완성도로 감동적으로 표현한 것이 ‘레미제라블’ 신드롬의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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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가 망명생활중 출간한 '레미제라블'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사진)는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가이다. 1802년 프랑스의 브장송에 태어났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소원대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숨은 재주인 문학적 재능이 곧 드러났다.
위고는 첫 시집 ‘오데와 잡영집’(1822)으로 주목받은 이래, 희곡 ‘크롬웰’(1827), 시집 ‘동방시집’(1829), 소설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날’(1829)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특히 ‘크롬웰’에 부친 서문은 고전주의 극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극 이론의 선언서라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위고가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나아가는 계기는 이 때 마련됐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희극 ‘에르나니’(1830)가 초연돼 낭만파와 고전파 사이의 ‘에르나니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로부터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1850년께까지 문단의 주류가 되었다. 그 후에도 위고는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며, 시집 ‘가을 낙엽’(1831), ‘내면의 음성’(1837), ‘햇살과 그늘’(1840), 희곡 ‘마리용 드 로름므’(1831), ‘힐 블라스’(1838) 등을 발표했다. 그 뒤 위고는 10여 년간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 활동에 전념했고, 1848년 2월 혁명 등을 계기로 인도주의적 정치 성향을 굳혔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국외로 추방을 당해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 등에서 거의 19년에 걸쳐 망명 생활을 했다. 레 미제라블도 이 시기에 출간됐다.
송태형 한국경제신문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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