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훈 사장은 성게알 까는 것 부터 시작…화장실 청소 등 혹독한 수업
전국 각지 돌며 직접 홍보…유명 일식당·마트에 납품 성공
2009년 3월. 당시 49세였던 윤일훈 사장(53)은 경북 포항시 북구 여천동 보성무역 성게알 창고에서 10여명의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1977년부터 오로지 성게알 제품 하나로 일본인 입맛을 사로잡아온 창업주 윤명섭 회장(당시 84세)이 32년 만에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회사에 들어온 지 꼭 10년 만이었다.
윤 사장의 첫 보직은 이사였다. 하지만 ‘무늬’만 이사였지 창업주는 단 한 번도 아들에게 편하게 쉴틈을 주지 않았다. 해녀들이 산지에서 수확한 성게를 트럭에 싣는 일부터 성게알까기, 심지어 회사 화장실 청소까지 시켰다. 윤 사장은 당시 직원 보기가 민망해 야반 도주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훌륭한 경영자가 돼 아버지를 꼭 이겨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겨나면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업무에만 매달렸다. 허름한 점퍼를 입고 종일 공장에서 일하다 지치면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일을 배웠다.
이렇게 3년의 세월을 보내자 ‘성게의 성자도 모르는 이사가 어디 있느냐’며 핀잔을 주던 임직원들의 태도도 확 달라졌다.
그는 이때 내수시장 개척의 필요성을 감지했다. 1990년대 초 일본 수출만으로 100억원 이상 매출을 올리며 승승 장구하던 회사가 2000년대 들어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 여파로 매출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창업주는 이 같은 아들의 제안에 “성게 양이 한정돼 있는 마당에 내수로 일부를 돌리면 자칫 수출물량 수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며 반대했다. 윤 사장은 이때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 뜻을 거스르고 내수판매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1년여 동안 거둔 수입은 고작 4500만원. 마케팅 비용을 감안하면 외부로 나간 비용이 갑절이나 많았다. 창업주는 이런 윤 사장에게 엄한 질책 대신 ‘더 열심히 해보라’고 힘을 실어줬다. 윤 사장은 이때부터 성게알 제품을 직접 들고 전국 각지를 돌며 홍보에 나섰다. 이런 노력 덕분에 국내 유명 일식당·회전초밥 전문점 등 200여곳과 백화점, 할인마트 등 국내 웬만한 곳에는 성게알 제품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2004년 내수 매출이 단숨에 2억5000만원으로 올라선 데 이어 2005년에는 5억원, 2010년 10억원, 작년 20억원 등 해마다 큰 폭의 성장세를 이어갔다. 1990년대 1200만달러였던 일본 수출은 2011년 380만달러, 작년에는 300만달러로 급감했다.
윤 사장은 현재 35% 수준인 내수 비중을 향후 3년 내 50%로 끌어올리고, 일본에 치우친 수출을 유럽 미국 등으로 다변화해 세계적인 성게알 유통업체로 자리잡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사계절 성게알을 즐길 수 있는 성게알 통조림과 성게알젓, 냉동 성게알 등 20여가지의 다양한 성게알 가공제품을 개발했다. 지난해부터는 포항 특산물인 과메기를 비롯 오징어 가공제품도 선보이고 있다.
윤 사장은 미국 남일리노이주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세계 최대 소비재기업인 프록터&갬블에 입사하는 등 가업을 승계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1990년 초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간병을 위해 귀국했다가 결국 가업을 잇는 쪽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도 그는 ‘하드앤죠이’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7년여 동안 아버지 그늘을 벗어나려 애썼다. 그는 회사에 들어와 일본에 자주 드나들면서 가업승계에 대한 인식이 확 달라졌다.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를 졸업하고도 가업인 스시(초밥)집이나 라면집을 물려받는 건 예사이고, 3~4대는 물론 수백년에 걸쳐 대를 잇고 있는 곳도 많더군요.”
윤 사장은 “오늘날 부자 나라 일본을 만든 데는 누대에 걸쳐 온 이 같은 장인정신이 큰 역할을 했다”며 “대대손손 성게알 명품을 이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청정지역 동해서 채취…'말똥성게' 日서 인기
보성무역은 청정해역 동해바다에서 해녀가 직접 채취한 자연산 성게알만을 고집한다. 특화된 가공기술을 이용해 맛과 향, 영양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연간 가공하는 성게알만 100여t에 이른다. 이 가운데 70여t이 일본으로 수출될 만큼 규모면에서 보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본이 보성 제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수출 물량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말똥 성게알 때문이다. 앙장구로 불리는 말똥성게는 과거 일본 시모노세키 지역 특산품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지금은 생산이 중단되면서 한국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일본은 여기다 전통적으로 된장국(미소시루)에서부터 생선회에 이르기까지 성게알을 이용한 요리가 잘 발달돼 있다. 100년이 넘게 성게알 제품만을 판매하는 전문점만 100여곳에 이르며 보성무역은 30여곳과 30여년 이상 거래하고 있다. 부자가 대대로 쌓아온 무한 신뢰 덕분이다.
윤일훈 사장은…
△1960년 경북 경주출생 △1989년 미국 남일리노이 주립대 경영학과 졸업 △1990년 일본 도쿄 일본어학교 고급과정 졸업△1993년 하드앤죠이 대표△2009년 5월 한국을 빛낸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2010년 경북도 신성장기업인 표창 △2011년 대구은행 포항지점 명예지점장
포항=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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