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문 따주고 신발 찾아주고…소방관은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입력 2013-02-08 15:16   수정 2013-02-08 21:14

뉴스인사이드

단순 민원성 119 신고 기승…작년 서울 화재출동 45%가 오인신고

돈 안든다는 점 악용…'일단 부르고 보자' 전화…구급차 年 200회 이용자도
비응급 신고 거절할 수 있지만 민원 무시 못해 일단 출동…진짜 응급환자 이용 못하기도



119 구조대 경력 21년차인 김모 소방장(47)은 2011년 여름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그해 7월 그는 구조출동 신고를 받고 서울 시내 한 대학으로 급히 출동했다. ‘신발 날리기 놀이를 하다 맞은편 건물에 신발 한 짝이 올라갔으니 대신 주워달라’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었지만 자칫 사고로 이어질까 염려스러워 현장을 찾은 것. “(신고한 학생들에게) 이런 일로 119를 부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타일렀어요. 그랬더니 공무원이 신고를 받았으면 당연히 와서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묻더군요. 할 말을 잃었습니다.”

3년차인 신모 소방사(29)도 지난해 여름 ‘황당한’ 신고를 받았다. 지난해 6월 한 시민이 길을 걷다 길가에 쓰러진 비둘기를 보고 “비둘기가 아파 보인다”며 119에 신고 전화를 걸었던 것. 지령을 받은 안전센터에서 운전원 1명, 부센터장 1명, 진압대원 2명 등 4명이 화재진압용 펌프차를 타고 현장으로 나갔다. 비둘기 구조에 소방관이 4명씩이나 동원됐다. 신 소방사는 “조류는 구청에서 관리하는데 밤이라 우리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며 허탈해했다.

전국 소방서 산하 119안전센터로 밀려드는 악성 민원인의 허위 신고전화 탓에 정작 재난을 당해 위급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구조해 병원으로 긴급 후송하는 소방 본연의 업무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위급환자 수송을 위해 운영되는 119 구급차량은 악성 민원인들의 개인 자가용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소방서 화재진압팀도 화재가 없을 경우 생활안전구조대로 편성돼 화장실 비데에 물이 샌다는 식의 신고나 문을 열어달라는 주문, 잃어버린 동물을 찾아달라는 단순 민원을 처리하느라 혹사당하고 있다. 소방관들 사이에 ‘119안전센터=심부름센터’라는 자조 섞인 말이 돈 지도 한참됐다.

○소방서마다 블랙리스트

각 지역소방서가 파악하고 있는 블랙리스트를 들여다보면 119안전센터의 현주소를 실감할 수 있다. 서울 상계동에는 강북지역 구급대원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4명의 악성 민원인인 일명 ‘F4’가 있다. 이들은 상습, 다용, 비(非)응급, 만취 등 네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춘 악성 민원인들이다. 술만 마셨다 하면 119 구급대원들을 불러 병원에 가자며 생떼를 쓰고 욕설을 해 구급대원들에겐 기피1호 인물들이다.

구급차를 개인 전용 자가용 정도로 여기는 민원인도 구조대원들을 지치게 한다. 특히 기초수급생활자들은 택시비 등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아예 진료예약을 해놓고 119에 위급하다고 허위신고를 한 뒤 차량이 오면 태연스럽게 병원을 오간다. 서대문소방서 박성준 소방교(34)는 “1주일에 서너 번씩 2년 동안 70대 투석환자를 병원으로 실어나른 적도 있다”며 “관내가 아닌 경기도 병원으로 가 달라는 민원인들을 만나면 정작 비상상황 발생 시 대처할 길이 없어 조마조마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월계119안전센터 양규봉 소방장(45)은 “‘노새’로 통하는 한 할머니는 각 소방서 구급대원들의 이름과 직위를 적은 수첩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걸핏하면 119를 부른다”며 “119 이용 횟수를 계산해보니 1년에 200회 이상 구급차를 이용한 적도 있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같은 센터 강신준 소방장(39)은 “악성 신고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들인데 불친절하다는 민원을 제기하면 소방관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어 자가용처럼 119 응급차량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개인 민원을 들어주다 소중한 생명을 잃은 안타까운 사례도 있었다. 한 소방관은 “2009년에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려 보건소까지 태워달라는 민원성 신고를 들어줬다가 가까운 아파트에서 기도가 막힌 아이가 사망했던 게 안타까웠다”며 “그때 이송을 거절하고 달려갔더라면 아이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도 자책한다”고 털어놨다. 뇌출혈이나 심장마비는 1분 1초가 급한데 사소한 신고 접수로 공백 상태가 생겨 아까운 생명을 잃는 것.

119 종합상황실 운영을 총괄하는 서울종합방재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화재출동 1만579건 중 46%인 4849건이 건물에서 나오는 수증기 등을 화재 연기로 착각한 신고였다. 구조출동은 12만4887건 중 16%인 1만9616건이 미처리됐다. 구급출동으로는 29만5855명을 이송했는데 그 중 9.3%인 2만7494건이 비응급 이송이었다. 하지만 처리 건수에 긴급 구조뿐만 아니라 단순 민원 처리 건수가 포함된 것을 감안하면 구조대 본연의 업무로 출동한 비율은 더 낮아진다.

○현장의 순직자도 국립묘지 안장 안돼

2011년 개정된 ‘119 구조 구급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구조출동의 경우 단순 문 개방, 물건 치우기, 동물의 단순 처리 및 구조, 주민생활 불편 해소 등의 경우엔 출동 요청을 거절할 수 있다. 구급대원도 단순 치통, 감기 환자, 술에 취한 사람, 검진이나 입원 목적으로 구급차를 부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출동 요청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시행령 개정 이후 오히려 단순 생활 민원을 처리하는 생활안전구조대를 서울의 모든 119안전센터로 확대한 것.

경찰과 달리 일선 소방서 소방관들의 인사권과 예산집행권은 해당 지자체장에게 있다. 그렇다 보니 관내 주민들의 민원에 예민할 수밖에 없어 관련 시행령은 개정됐지만 정작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단순 민원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 시내 한 119안전센터 소방관은 “소방서별로 실적을 따지는데 출동이 적은 곳은 인력이 조정되기 때문에 단순 민원이라도 거절할 수 없다”고 전했다.

거절해도 될 단순 민원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소방관이 순직한 경우도 있었다. ‘고양이 소방관’으로 불리는 속초소방서 고 김상현 소방교는 2011년 7월 고양이 구조 작업에 투입됐다가 로프가 끊어지면서 학원 건물 3층에서 10m 아래로 추락해 변을 당했다. 그러나 정부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 소방관을 ‘화재 진압, 인명 구조 및 구급 업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소방공무원’으로 한정하고 있어 김 소방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했다.

○“가짜 신고 땐 과태료 물려야”

일선 소방관들은 “출동에 관한 명백한 기준을 세우고 가짜 신고가 명백할 때는 과태료를 물리는 방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 시내 소방서 구조대의 김모 부대장은 “법은 (단순 신고 시) 출동하지 말라고 하는데 실제론 생활구조대란 이름으로 단순 민원을 처리하고 있어 어폐가 있다”며 “효율적인 소방력 활용을 위해 시행령 외에도 소방방재청 내부 규정이나 지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병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119 출동을 유료화하는 것은 국가서비스 관점에서 적절하지 않지만 엉터리 신고를 거절할 수 있는 자율성과 민원이 제기됐을 때 적극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신고를 거절했다가 만에 하나 현장에서 불상사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소방관들이 진다”며 “이 때문에 거절할 때도 신고자에게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하고, 나중에 민원이 제기됐을 때 일일이 소명하느니 차라리 출동해서 몸이 고생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박상익/이지훈 기자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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