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고 단순한 국민 눈높이 못맞춰 스스로 신뢰의 위기 불러들여
추창근 기획심의실장, 논설위원 kunny@hankyung.com
차기 정부의 정상적인 출범은 물 건너갔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한 달을 훨씬 넘긴 뒤 총리로 지명된 김용준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헝클어졌다. 다시 정홍원 후보로 청문회 준비에 들어갔지만 대통령 취임까지 겨우 11일밖에 남지 않았다. 검증의 벽을 넘기 전의 장관 인선은 ‘국무총리 제청으로 국무위원을 임명’토록 규정한 헌법 87조의 위반이다.
‘준비된 대통령’의 준비되지 못한 정권이다. 약속과 원칙을 내걸었던 박근혜 새 정부는 이미 인사 실패의 늪에 빠져 첫걸음도 내딛기 전 신뢰의 위기를 자초했다. 어제 호명(呼名)된 외교·법무·국방·안전행정·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들, 앞으로 또 이름이 나올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옥석(玉石)이 뒤섞여 있을 터인데 적격성과 도덕성을 제대로 따져볼 시간이 없다. 바람직하지 않게도 앞으로 5년의 정책 방향은 뒷전이고 정권 출범 때까지 정치의 모든 이슈는 청문회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검증 과정에서 후보자들의 또 무슨 흠결이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고 보면 몇 사람은 야당, 또는 국민으로부터 거부당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인사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새 정권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그 국민 여론의 비토(veto)가 갖는 의미를 인사권자는 과연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다.
이번 총리 후보의 교체 과정에서 벌어진 혼선은 불행하게도 공(公)과 사(私)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온 헛발질이었다. 그런데도 잘못된 인선의 책임을 신상털기에 치우친 무차별 검증과 청문회 탓으로 돌리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본말이 뒤바뀐 것이다. 능력이 출중하고 도덕적 결함도 없는 인물 찾아내기의 어려움을 토로한 푸념임을 모르지 않는다. 국회 청문회가 후보자의 자질 검증보다는 흠집내기로 정권을 골탕먹이는 데 매달리는 것도 고쳐져야 할 악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고위 공직자를 가려 뽑고 쓰는 일의 엄중함에 대한 인사권자의 인식이 그 정도 수준이고, 스스로의 허물을 그렇게 가리려 한다면 5년 전 이명박 정부의 분열적 인사와 다를 게 없다.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에서 가장 우선되는 전제는 공공성이다. 나랏일을 떠맡을 공직 인사는 결코 인사권자의 것이 아니다. 고위 공직자에게 엄격한 도덕성과 윤리적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권력이 사적 이익의 수단이 아니라 공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봉록(俸祿)은 국민의 세금이다. 당연히 국민 눈높이에 맞춘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그것이 검증이고 청문회인 것이다. 검증받는 공직 후보자들은 인격의 상처를 말하기 전에, 스스로 부와 지위·명예를 함께 누리는 데 부끄럼없는 삶을 살았는지부터 되돌아봐야 할 일이다. 살아온 과정의 작은 결함이라 할지라도 국민들이 납득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문제인 것이지 발가벗기는 검증의 잣대를 탓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어느 정권에서나 공직 인사에서 도덕성 시비가 되풀이된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도덕불감증과 후진성을 확인시켜주는 서글픈 현상이다. 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이래 공직 윤리의 작은 문제라도 제기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지도층의 부패 성향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에 다름아니다. 단골 메뉴는 본인 또는 자식들의 병역의무 이행에 문제가 있거나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등 실정법까지 어긴 사례들이다. 이런 마당에 법치(法治)와 원칙을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나라의 큰일 하는 사람에게 작은 흠결이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 절대 다수는 법 잘 지키고, 땀 흘려 번 돈으로 세금 꼬박꼬박 내고, 자식 병역문제로 책 잡힐 일 없고, 위장전입이니 부동산투기니 그런 것 모르고 살아왔다. 정말 낮고 단순한 국민들의 눈높이이자 우리 사회의 보편적 상식이 수용할 수 있는 공직인사 기준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신상을 털어 별로 나올 게 없다면 인사청문회는 자연히 정책 검증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신뢰를 얻고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핵심 기반이 그런 기본 요건에 대한 충족이다. 공직자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면 이는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어떤 정책도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 믿음의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
추창근 기획심의실장, 논설위원 kunn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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