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풍경에서 소박한 삶을 훔쳤다

입력 2013-02-21 16:39   수정 2013-02-21 21:29

'강화도 시인' 함민복 새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출간


‘강화도 시인’ 함민복 씨(사진)가 다섯 번째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을 펴냈다. 2005년 《말랑말랑한 힘》 이후 8년 만이다. 17년째 강화에 살고 있는 그는 사소한 일상과 풍경에서 세상의 모습을 비추고, 자연과 함께 꾸려나가는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첫 번째 시 ‘명함’은 일곱 행의 은유를 통해 세상을 그린다. 일곱 행이면 세상을 설명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는 듯, 각각의 행에서 끄집어낸 세상을 합치면서 전체 모습을 아우른다.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길의 명함은 이정표다/돌의 명함은 침묵이다/꽃의 명함은 향기다/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

시인은 길을 걷는 노인, 열쇠를 조끼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열쇠공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길에 진액을 다 빼앗긴/저 바싹 마른 노인/(…)/어찌 보면 몸을 흔들며/자신의 몸속에 든 길을/길 위에 털어놓는 것 같다//자신이 걸어온 길인, 몸의 발자국/숨을 멈추고서야/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을거나//길은 유서/몸은 붓’(‘비정한 길’ 부분)

‘열쇠 자물쇠 주렁주렁 달린 조끼 벗고/겨울바람 피해 농협 현금자동지급기 코너에서/콜라에 빵을 먹고 있는 할아버지/할아버지는 수많은 열쇠를 깎아 무엇을 열었을까/(…)/내 몸뚱이는 무슨 열쇠일까/무엇을 열겠다고 세상을 떠돌아왔는가/혼자여서 쩔렁거리지도 못하는/(…)/상처로 깎은 열쇠가 되어/결국/이 악물고 호흡 끊으며/죽음만 비틀어 열고 말 존재인가’(‘열쇠왕’ 부분)

그는 다시 자신의 인생을 넘어 보편적인 삶으로 나아간다. 경마장 가는 사람들이나 잉크 번진 빨래 같은 일상의 풍경을 통해서다. 허공을 앞발로 힘차게 딛고 있는 경마장의 청동마상과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모든 비상의 첫발은 허공을 짚는 것이라고/희망에 중독된 사람들 우르르 몰려간다’(‘꽃 피는 경마장’ 중)고 쓴다.

잉크로 얼룩진 빨래를 보면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펜 뚜껑 여니 잉크가 가득/빨래 따라 돌며/세탁기 속 움직임 속기했구나/(…)/얼룩과 때를 지우며/자신의 움직임을 빨래에 기록하는/세탁기는 지움을 글씨로 하는가/어쩜/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지우고 있는 사람들도/지움을 글씨 삼는 것 아닐까/사랑과 비겁과 회한을 숨으로/쓰고 지우고 있는 것 아닐까//구름 흐른다 바람 분다/지구의 글씨는 흘림체다’(‘흘림체’ 부분)

방앗간, 농약상회, 도라지밭을 배경으로 강화도의 소박한 삶도 풀어놓는다.

‘길을 가다가 도라지/밭에 올라가보았지요/꽃 들여다보고 있으면/주인도 혼내지 못할 것 같았고/혼내도 혼나지 않을 것 같았지요//고향집 장독대 뒤에 피어 있던/도라지꽃도 까마득 진 줄 모르고 피어났지요/(…)/옛날에 장독대에서 각진 꽃봉오리 터뜨리던/폭폭 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 있지요’(‘도라지 밭에서’ 부분)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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