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가던 1966년 여름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상기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와 100만원짜리 수표 2장을 내보였다. “JP가 격려금 조로 주더군. 마음대로 쓰라는 거야.” 당시 200만원은 서울에 집을 두어 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 끝에 건축·예술전문잡지를 구상하고 직원들에게 “자네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건축과 미술 그리고 도시계획’이란 부제가 붙은 월간지 ‘공간’은 그렇게 탄생했다.
일본 유학생 신분으로 1959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1등으로 당선돼 단숨에 스타가 된 김수근은 자유센터, 공간사옥,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등을 설계하며 한국 현대건축을 이끌었다. 경부고속도로 기본계획, 포항제철 입지선정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도맡았을 만큼 정권 실력자들과 친분을 유지했으면서도 건축에 대한 소신만은 굽히지 않았다. ‘공간’은 법주사 팔상전을 형식적으로 재현한 중앙박물관을 지으려는 정부 계획에 ‘양복 입고 두루마기 걸친 꼴’이라고 거침없이 비판했다. 1975년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디자인이 정치적 입김 탓에 졸작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맹공을 가했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공옥진의 ‘병신춤’, 김덕수 패의 ‘사물놀이’를 발굴해 세상에 알린 것도 ‘공간’이었다. 박용숙 미술평론가, 오광수 문화예술위원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공간 편집실을 거쳐간 문화예술인도 숱하다. 하지만 공간그룹 내에서 잡지팀은 찬밥 신세였다고 한다. 돈을 벌기보다는 쓰는 부서인 데다 생활태도가 헐렁해서 회의시간조차 제대로 안 지킨다는 지적을 받곤했다.
2007년 1월호부터는 광고 없이 기사를 한글과 영문으로 함께 싣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지의 주요 대학과 도서관들도 꾸준히 구독한다. 건축을 비롯해 미술, 디자인 등 시각문화 전반에 대해 한국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주요 소스가 된 것이다. 전문지로 위상이 높아지면서 2008년에는 미국의 학술정보 제공업체인 ‘톰슨 로이터’의 예술·인문학 인용 색인에도 등재됐다.
모기업 부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공간’을 살리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근 반세기 동안 543호까지 내면서 한국 예술과 건축문화를 소리없이 지원해온 ‘문화재급 잡지’ 발행이 중단되는 일을 막자는 것이다. 하긴 ‘공간’이 어렵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김수근은 1975년 9월 창간 100호를 맞아 “등사판을 긁는 한이 있더라도 발행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구독자 늘리기 캠페인을 벌이든, 뜻있는 이가 인수하든 창간 정신과 전통은 이어갔으면 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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