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기자/ 사진 정영란 기자] “관객들이 극장을 나설 때 ‘야 정청, 시* 욕 진짜 잘하더라’라고 말하셨으면 좋겠어요. 욕의 끝을 보고 싶었죠. 들어도 거부감 들지 않는 욕을 하는건 정말 어렵거든요”
누군가는 ‘신세계’의 정청이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 캐릭터와 너무 비슷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비열한 미소와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 닮았다. 황정민은 “백사장 캐릭터를 ‘업그레이드’ 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의 말이 맞다. 정청은 확실히 백사장과 닮았다. 그런데 관객은 정청에게서 희열을 느낀다.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업그레이드’다.
‘신세계’는 최민식, 이정재, 황정민이 삼각구도를 형성하는 영화다. 공석이 된 범죄조직 보스 자리를 노리는 2인자 정청(황정민)과 후계승계에 개입하려는 경찰(최민식), 경찰 출신으로 조직에 잠입해 정청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이자성(이정재)의 음모와 배신, 의리를 그렸다.
“삼각구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려면 누구 하나 뒤처지거나 치고 나가선 안돼요. 자기 포지션을 믿고 확실하게 소화할 줄 알아야 하죠. (최)민식이 형이 바탕을 잘 깔아주셨어요. (이)정재도 감정을 감추는 연기가 힘들었을 텐데 잘 해줬죠. 저는 뭐, 쉬웠어요(웃음). 그냥 제 캐릭터 안에서 놀아버리면 되거든요”
황정민은 특히 이정재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다. “내가 이자성을 연기 했으면 죽고 싶었을 것”이라는 그는 속 마음을 감추고 외줄타기를 해야 했던 이정재의 고충을 전했다. “중심을 잘 잡았습니다. 민식이 형과 제가 마음껏 연기의 향연을 벌이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웃음) 이정재가 연기한 이자성은 너무 티나게 연기해도 욕먹고, 안하면 안한다고 욕먹는 캐릭터죠. 아마 (이정재가) 엄청 뿌듯해 했을 겁니다”
◆중국어 대사?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황정민이 연기한 정청은 범죄조직 골드문의 핵심 사업부문을 포함해 중국 삼합회의 무역을 독점, 실질적 후계자로 주목 받는 인물이다. 농담을 즐기고 수하들을 가족처럼 대하며 폭력배이지만 낭만을 안다. 동시에 냉철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지닌 다채로운 캐릭터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에 대해서 황정민은 “나는 신나게 놀았고 박훈정 감독이 잘 다듬어 줘서 완성 됐다”고 말했다. “화교출신으로 조직 2인자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얼마나 지독했을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면서 유들유들한 면도 있어야 하구요.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워보이는 카멜레온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박훈정 감독이 만들어 놓은 캐릭터에 애드리브를 섞어가며 자유스럽게 표현한 것이 통했죠”
“그저 신나게 놀았을 뿐”이라고 표현했지만 황정민의 디테일은 ‘신세계’ 곳곳에 녹았다. 이자성과 첫 대면인 공항 장면이 대표적. “‘신세계’는 기본적으로 건달, 양아치 영화”라는 그는 “잘 차려 입었지만 멋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싸보이고 언밸런스 한 느낌이랄까”라고 전했다.
“공항에 등장한 정청을 보시면 비행기 슬리퍼를 신고 있습니다. 옆에는 부하가 구두를 양손에 받치고 있죠. 이 장면이 제일 중요했어요. 관객에게 주는 첫 이미지, 저에겐 첫 단추를 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사실 이 장면을 찍을 땐 부끄러웠어요. 중국말로 했다가 한국말 했다가 욕도 했다가… 주위에 계신 분들 중 절반은 일반 승객분들이었거든요. 완전 아수라장이었죠. 저기서는 폰카로 찍고 있고 저는 ‘생지랄’을 하고 있고(웃음)”
정청은 화교 출신인 탓에 대사 중 절반은 중국어다. 하지만 황정민은 “중국어는 한마디도 모른다”고 털어놨다. 극중 변호사로 출연한 배우가 실은 그의 중국어 선생님이었고 옆에서 하나하나 지도해준 덕에 어색하지 않은 중국어 연기가 가능했다.
“지금은 대사 다 까먹었어요. 아, 하나 생각나는게 있네요. ‘뚜이부치(미안해) 시*’, 뚜이부치 뒤에는 진짜 욕이에요.(웃음) 내가 중국 사람도 아니고 말 억양에 신경 쓰기보다 연기에 더 집중하려고 했어요. 뭐, 안되면 후시에서 해결해도 되고, 하하. 다행히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은 한 것 같더라구요. 영화에 들어간 중국어 대사는 현장에서 직접 한 겁니다”
◆미친 듯이 달려온 10년… 이제는 편안하게
2001년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데뷔한 황정민은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너는 내 운명’으로 연기력을 인정 받은 뒤 ‘사생결단’, ‘행복’, ‘부당거래’, ‘댄싱퀸’ 등 숨 가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아쉽게 흥행에 고배를 마신 작품도 있지만 그의 이름만 보고도 작품을 선택하는 관객이 있을 정도로 신뢰감을 주는 배우가 됐다.
“정말 경주마처럼 달려왔어요. ‘잘해야 한다’는 일념하게 30대를 미친 듯이 보냈죠. 그런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편안한 40대를 맞을 수 있었던거 같아요. 요즘엔 생각이 바뀌었어요. ‘야, 황정민. 너 연기 잘해. 뭘 더 어떻게 잘해. 그만 잘 하려고 해. 놀아. 즐겨. 못하면 어때’ 아등바등하기 보다 스스로 놓으려고 해요. 예전만큼 날카롭고 예민한 것이 스스로 없어졌달까요. 예전에는 해내야겠다는 조바심이 관객에게 부담 아닌 부담을 줬던거 같기도 해요. 이제는 반대죠. 마치 정청 같달까요? 만약 30대에 정청을 연기 했다면 다양한 색을 담아내지 못했을거 같아요. 그냥 건달 같았겠죠. 플러스 알파 없이”
‘신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엘리베이터 액션도 긴장감으로 시작해 편안한 상태에서 마무리 됐다. 그의 말을 빌리면 “소 뒷발에 쥐 잡은 장면”이다.
“원래 액션에는 합이 정해져 있어요. 안무 같은 거죠. 정확하게 연습을 해서 딱딱 들어 맞는. 리허설 할 때 얼마나 멋있었는지 몰라요. 이렇게 찔렀다가 저렇게 피하고. 그런데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니 구두에 가짜 피가 묻어 미끄러워서 제대로 설 수가 없는 거에요. 나중에는 합이고 뭐고 뭉그러져서 완전 개싸움이 됐죠.(웃음) 그런데 이게 새로운 느낌이 있는거에요. 죽이려고 달려드는 독이 아니라 다들 살려고 엘리베이터에서 발버둥 쳤달까. 처키 같지 않았나요? 하하”
◆ 황정민의 ‘신세계’는 어디?
영화 ‘신세계’는 각기 다른 세계를 꿈꾸는 세 명의 남자가 벌이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황정민이 원하는 ‘신세계’는 어디일까. 어떤 파라다이스를 바라고 있을까.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이 가득한 해변? 물론 와이프 없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사실 ‘신세계’란거 간단합니다. 제가 말한 누드비치도 그런거죠. 한국 사람들은 너무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는 것 같아요. 느리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한발짝 뒤로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죠. 그렇게 살면 별로 재미 없지 않나요? 속도를 줄이는 것이 뒤처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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