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차기 일본은행 총재로 대표적인 성장론자로 알려진 구로다 하루히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가 내정됐다. 이로써 ‘엔저(低)’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가 추진될 수 있는 여건이 모두 마련됐다. 엔·달러 환율이 100엔을 훌쩍 넘길 것이란 예상이 벌써 나오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이 가장 불리하다. 하지만 아베노믹스에는 몇 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 로빈슨 크루소 비유가 들어가는 ‘국수주의 함정(Robinson’s ultranationalism trap)’이다. 아베노믹스 추진 이후 인위적인 엔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으로 갈린다. 하나는 일본 경제가 오랫동안 당면한 디플레이션 타개책으로 엔저를 묵인하는 시각이다.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근린 궁핍화 차원으로 인식해 적극 반발하면서 글로벌 환율전쟁에 가담하는 입장이다. 엔저에 따른 유로화 강세 피해가 심한 유럽 국가와 대부분 신흥국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묵인해온 국가들도 엔저가 더 심해지면 이런 입장에 속속 가담하면서 글로벌 환율전쟁이 점입가경(漸入佳境)에 치달을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J-커브 함정(J-curve trap)’이다. 아베 정부의 의도대로 엔저가 무역수지 개선과 이를 통한 경기부양이 가능해지려면 ‘마셜-러너 조건(Marshall-Lerner condition)’을 충족해야 한다. 국제무역이론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다뤄지는 이 조건은 수출입 공급에서 문제가 없을 경우 외화표시 수출 수요의 가격탄력성과 자국통화표시 수입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합한 값이 ‘1’을 넘어야 엔저가 무역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때는 무역수지가 더 악화되고, 경기부양도 외수기여도가 떨어진다. 특히 엔저에 따른 수출입 가격 변화에도 물량 변화가 쉽지 않은 초기에는 무역수지가 심하게 악화된다. 엔저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적자 폭이 커진 1월 일본의 무역통계가 ‘J-커브 함정’에 빠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뒷받침해 준다.
셋째, ‘부메랑 함정(boomerang trap)’이다. 갈수록 나라 안팎에서 반대가 심해짐에도 불구, 아베 정부가 엔저를 무리하게 유도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디플레이션 타개다. 엔저가 되면 수출이 늘어남과 동시에 물가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기대된다. 수출 업종 중심으로 일본 기업의 주가가 강하게 반등하는 것은 이런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수출 증대보다 내수 확대가 더 중요하다. 인구 고령화 등으로 일본의 내수시장은 앞으로도 쉽게 회복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무리한 엔저로 남아 있는 내수 기반마저 무너질 경우 일본의 경기침체가 더 장기화되는 자충수로 작용할 수 있다. 한때 국제 외환시장에서 ‘미스터 엔’으로 통했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아오야마대 교수가 아베식 엔저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넷째, 일본 내 ‘자금이탈 함정(exodus trap)’이다. 아베노믹스 초기에는 일본 내 자금이 더 풍부해진다.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자산매입 과정에서 풀리는 유동성에다 ‘체리 피킹(cherry picking)’ 차원에서 주가 상승을 겨냥한 외국 자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체리 피킹이란 주가가 적정 수준에서 떨어질수록 체리가 무르익어 따 먹으면(주식 매입) 맛있게 먹을 수 있다(투자 수익)는 데서 비롯된 일종의 저가 매수 전략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상황이다. ‘S자형 투자원칙’이나 ‘하이먼-민스크의 리스크 이론’대로 초기 단계를 지나 일본 경제 회복과 같은 추가적인 투자 유인을 제공하지 못할 경우 어느 날 갑자기 자금이 이탈할 수 있다. 통화 가치를 감안한 피셔의 국제간 자금 이동 이론상 ‘제로(0) 금리’에다 엔저까지 가세하면 엔 캐리 자금은 언제든지 이탈할 수 있는 여건이 충족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역(逆) 자산 효과’까지 겹쳐 경기는 부메랑 함정에 더 빠져들고, 일본 내에서는 자금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다.
다섯째, ‘좀비 함정(zombie trap)’이다. 아베 정부의 엔저 정책처럼 특정국 경제에서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기대가 무너질 경우 정책 당국이 어떤 신호를 보내더라도 국민들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좀비 현상이 가장 먼저 나타날 수 있다. 좀비는 시체와 같다는 의미다.
좀비 현상이 더 심해지면 비이성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경제 분야에서 비이성적인 행동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내가 하면 옳고 남이 하면 잘못됐다’고 보는 이분법적 사고(dichotomy)를 말한다. 이분법 경제는 일본처럼 장기간 침체 국면이 지속되는 국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敵)이다.
결국 아베 정부가 5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앞으로 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지금보다 엔저를 더 진행하려 무리수를 두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유도했던 엔저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 경쟁국과의 공존을 모색하고 다른 정책을 보완하는 길이다. 무리하게 전자의 길을 택한다면 아베 총리는 머지않은 장래에 하야할 운명에 처할 수 있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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