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3월의 눈', 80대 노부부 쓸쓸한 하루…사실성과 절제미 뛰어나

입력 2013-03-07 17:24   수정 2013-03-0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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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옥으로 세트 구성…조명 밝기로 시간 흐름 표현



툇마루에 걸터앉아 살짝 미소 지으며 객석을 바라보던 이순(백성희, 박혜진 분)의 마지막 모습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극이 진행되는 80여분간 아련하게 스며들어 차곡차곡 쌓이던 안타까움과 슬픔은 남편 장오(변희봉 분)를 떠나보내고 뼈대만 앙상한 고택에 홀로 남은 이순의 주름진 얼굴에서 끝난 듯싶었다. 그러나 커튼콜에서 장오와 이순이 손잡고 인사할 때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 중인 ‘3월의 눈(雪)’은 재개발 바람에 곧 철거될 운명의 한옥에 사는 80대 노부부 장오와 이순의 하루 삶을 담았다. 정확하게는 장오의 하루다.

내일이면 집은 허물어지고, 빚더미에 오른 손자에게 집을 판 돈을 다 내준 장오는 요양원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 장오는 이 모든 것을 잊은 듯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이순을 추억 속에 되살려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고 지나온 삶을 나눈다. 봄을 맞아 낡은 문창호지를 함께 떼 내고 새로 바르기도 한다. 장오가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인부들과 함께 나타나 마룻장을 떼 낸다. 장오는 눈 내리는 이튿날 새벽 짐을 챙겨 이순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선다.

연극은 격정적인 갈등의 분출이나 극적인 반전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추억을 되살린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지만 무대는 극히 사실적이다. 세트는 재질까지 전통 한옥을 그대로 재현했고, 모든 대사는 일상 언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배우들의 행동과 말투, 동작에도 과장이나 꾸밈이 없다.

조명을 완전히 어둡게 해 장면을 전환하는 암전이 한 번도 없다. 인물들의 드나듦과 조명의 밝기 조절만으로 하루 시간의 흐름을 표현했다. 마치 카메라를 고정시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의 롱테이크(컷을 나누지 않고 오래 찍기)로 찍은 극사실주의 영화를 본 느낌이다.

이 연극은 2011년 고(故) 장민호(1924~2012년)와 원로 배우 백성희(88)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2011년 이들이 직접 노부부로 초연한 이후 국립극단의 3월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구조와 내용의 무대에 관객들의 시선을 계속 모아두는 힘은 배우들이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열연이란 말로는 충분치 않다. 지난해 박근형 오영수에 이어 4대 장오 역을 맡은 변희봉(71)은 느릿하고 긴 호흡과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쓸쓸한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역 최고령 배우인 백성희는 무대가 아닌 실제 삶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순 역을 3년째 내리 맡은 박혜진(55)은 정겹고 수다스러우면서도 후덕한 ‘우리들의 할머니’ 그 자체였다.

다만 극장 밖에서 때때로 들려오는 차량 소음이 귀에 거슬렸다. 특히 정적이 흐르고 집중을 요하는 장면에서 극의 몰입을 방해했다. 극의 배경이 재개발 열풍이 불어닥친 동네여서 효과음으로 간주하라는 것일까. 서울 서계동 옛 기무사 부지에 자리 잡은 국립극단은 수송대 창고를 리모델링해 상업극장으로 활용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방음 시설이 아쉬웠다. 오는 23일까지, 관람료는 3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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