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은 그리스인만 못하고, 체력은 게르만인보다 약하고, 기술은 에트루리아인에 뒤지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인에 밀린 로마인…. 이런 민족이 로마제국을 건설하고 천년을 유지한 힘은 뭘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그 원천으로 꼽는다. 로마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가 로마제국 천년의 버팀목이었다는 얘기다. 왕과 귀족, 원로들이 평민보다 먼저 세금을 납부하고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이른바 가진 자의 도덕적 실천이 조그마한 도시를 천년제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진단대로라면 로마제국 몰락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쇠락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척점에는 ‘모럴 해저드’(moral hazard)가 자리한다. 모럴 해저드는 단어 뜻 그대로 ‘도덕적 의무’의 반대적 개념, 즉 ‘도덕적 해이’를 의미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모럴 해저드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해 정보가 부족한 계약자가 비용을 추가로 부담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화재보험 가입자의 불조심 소홀로 보험사 손실이 커지고 다른 가입자의 보험료가 올라가는 것이 한 사례다. 주로 금융상품 계약자 간의 정보 불균형에서 유래한 모럴 해저드는 그 의미가 다양하게 확대됐다. 법과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사익 추구, 스스로의 책임 회피, 지나친 집단이기주의, 명분만을 앞세운 무리한 정치 공약 역시 모습만 달리한 모럴 해저드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가 수시로 뉴스를 타지만 모럴 해저드는 ‘귀족’ ‘노예’를 가리지 않는다.
국가·사회의 건강지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모럴 해저드가 좌우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넘쳐나면 책임 배려 관용 양보 공존 등의 미덕으로 사회가 훈훈해지지만, 모럴 해저드가 기승을 부리면 거짓 편법 사기 부패 배신 등의 악성 바이러스가 사회를 어지럽힌다. 지도층의 훈훈한 미담보다 고위층 자녀들의 병역 기피, 논문 표절, 입시 부정, 기업의 회계 조작, 스포츠 승부 조작 등이 단골 뉴스 메뉴인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사회에선 모럴 해저드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더 위세를 떨치지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은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출발점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회복임을 함의한다. 모럴 해저드의 개념을 정립한 케네스 애로 교수는 맹자의 성선설에 기반한 ‘도덕’보다 순자의 성악설에 근거한 ‘시스템’에서 모럴 해저드의 해법을 찾는다. 법과 제도를 치밀하게 운영하고 도덕을 보조 수단으로 삼아야 양심적인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은행의 순서 번호표는 새치기라는 모럴 해저드를 막는 일종의 시스템인 셈이다. 제도가 우선인지, 도덕성 함양이 먼저인지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럴 해저드를 방치하기엔 그 수위가 너무 높아졌다. 4, 5면에서 우리 사회 모럴 해저드 실태와 원인, 해법 등을 상세히 살펴보자.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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