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3월 발자크(1799~1850)는 ‘외국 여인’이라고 서명한 발신자 불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발신자는 서두에서 자신이 발자크의 애독자라고 밝힌 뒤 그의 최신작인 ‘나귀 가죽’이 지나치게 무신론적이고 여성을 비하하고 있다고 질책하면서 초기 작품에서 보여준 따뜻한 시선으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한창 신인 작가로 프랑스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발자크로서는 충격이었다. 구구절절 교양이 풍기고 세련된 어법을 구사하는 이 묘령의 외국 독자에게 자신의 진의를 해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고매한 지성을 소유한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신문 ‘가제트 드 프랑스’에 자신이 발신자 불명의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에게 답장을 할 수 없어 유감이라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했다.
여인은 그 광고를 보지는 못했지만 발자크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다. 11월7일 발송한 7장에 걸친 장문의 편지에서 여인은 그의 작품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심지어 “나는 당신을 나 자신의 영적인 직관을 통해 알고 있답니다. 나는 당신의 모습을 내 방식으로 그려보지요. 당신을 향해 눈을 감으면 나는 곧 ‘아, 그이야’라고 소리친답니다”라는 뜨거운 내용도 서슴지 않았다.
젊은 작가의 열정에 잔득 불만 댕겨놓고 여인은 정작 편지의 말미에서는 자신들이 평생 절대로 만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도 밝힐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보낸 편지에서는 그의 답장을 받고 싶다며 자신의 개인 사서함 주소를 알려줘 심리적 동요를 드러낸다. 사실 여인 쪽이 더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결국 여인은 발자크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이듬해 그는 자신이 남편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는데 스위스의 뇌샤텔에서 만나자고 제의한다. 이미 편지를 통해 사랑을 고백한 발자크로서는 오매불망 그리던 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1833년 9월25일 마침내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두 사람은 뇌샤텔의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처음으로 마주친다. 여인은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여인의 이름은 에벨리나 한스카(1805~1882). 폴란드의 공작 한스키의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만났는데 하루는 한스카의 남편이 자리를 비켜주는 신사도를 발휘하기도 했다. 남편은 두 사람이 ‘위험한’ 관계로 발전하리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떡갈나무 그늘 아래서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 제네바에서 재회할 것을 약속한다. 뇌샤텔을 떠나기 전 한스카는 발자크에게 뜨거운 연서를 보내온다. “나쁜 사람 같으니. 당신은 내 눈을 보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게 무엇인지 몰랐단 말이에요. 아,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는 사랑에 빠진 여인이 갖게 마련인 욕망을 느꼈을 뿐이에요.”
약속한 크리스마스날. 발자크는 약속대로 제네바에 당도했다.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했고 한스카는 발자크에게 장래를 기약하는 뜻으로 반지를 선물했다. 발자크도 한스카를 자신의 철학소설 ‘세라피타’의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부인의 사랑에 화답했다. 이후 둘은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오가며 은밀히 사랑을 나눈다.
1841년 발자크는 한스카에게 자신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는다. 한스카는 발자크와의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장벽이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한스카의 영지가 프랑스 소설가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낀 한스키 공작의 인척들이 크게 반발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공작의 숙부가 유언장의 내용이 무효라며 자신이 상속권자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한스카는 결혼을 유보하고 재산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는다.
1844년 한스카가 재산권 소송에서 승리함으로써 혼인을 가로막던 장벽은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더 큰 장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러시아 황제가 두 사람의 혼인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차례의 청원 끝에 결혼 허가가 떨어진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였다. 단 한스카가 자신의 영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이었다. 결국 한스카는 영지를 딸 안나에게 물려준다. 1850년 3월14일 발자크와 한스카는 베르디치프의 작은 교회에서 조촐하게 혼례를 치른다. 장장 18년에 걸친 사랑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이때 발자크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5월 말 파리로 돌아온 후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7월에는 시력마저 잃었다. 한스카가 그의 들릴 듯 말듯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통해 대작 ‘인간희극’의 마지막 부분들을 받아 적었다. 1850년 8월18일 문호 발자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를 남긴 채 밤하늘의 별이 됐다. 발자크가 죽은 뒤 한스카는 남편의 유고를 정리, 그의 전집을 발간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인간희극’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위대한 사랑의 완성이었다.
오늘도 수많은 독자들이 발자크의 명작을 펼치며 두 사람의 동화처럼 아름다운 로맨스를 떠올린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되새기면서.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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