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노후' 라는 이름의 선물

입력 2013-03-14 17:17   수정 2013-03-15 05:20

사람마다 다른 모습일 은퇴 후 일상…어릴적 좋아한 학과목 쪽 일도 좋을 것

이현종 <HS애드 대표크리에이티브디렉터 jjongcd@hsad.co.kr>



영락없는 늙은 고양이다. 1인용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햇살을 받고 있는 내 품새가 그렇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무렵, 집사람의 명령이 떨어졌다. 간밤의 폭음으로 머리는 띵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쌩쌩하게 보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연스러운 얼굴을 한 채 양재동 꽃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봄이 왔다고 수근들 댔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겐 여전히 바람이 차가웠다.

주차를 하고 상가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로 걷기조차 힘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꽃을 좋아한 거야?” 푸념을 해대는 사이, 아내는 이 꽃 저 꽃 고르느라 여념이 없다. 아내의 가장 부러운 장기 중 하나는 식물 이름을 많이 안다는 것이다. 산길을 오를 때도 모르는 풀이 없고 인사 안 하는 꽃이 없다. 매번 가르쳐 줘도 난 매번 까먹는다.

그런데도 아내는 시골 생활보다는 도시 생활을 고집한다. 많은 사람이 노후에 전원생활을 꿈꾸지만, 정작 시골에서 자란 아내는 도시를 꿈꾼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시골 생활을 물리도록 해봤다는 것이고(아무래도 이건 과장된 핑계다), 두 번째는 해봤자, 그 많은 시골 일이 자기 일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란다. 이건 좀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우리의 노후 계획은 일단 도시의 삶이다.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목을 죈다. 그렇다고 내게 특별한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운명의 손에 이끌려 왔듯이 또 어딘가로 데려다 주겠지 하며 눙칠 뿐이다. 안일하고 뻔뻔하다. 얼마 전엔 이런 뻔뻔함에 경종을 울리는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직장에서 사수로 모셨던 분인데 은퇴 후에 많은 시간을 천주교 교인으로 보내다, 얼마 전엔 2년 과정의 신학원을 졸업하셨다고 한다. 그 이메일은 신학원을 졸업하는 본인의 소회를 적은 글이었다. 노년에 맞은 학창 생활의 소소한 감상과 감사의 마음을 적은 글인데 글목을 돌 때마다 그분의 기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예전에 어느 분이 이런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혹시 나중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라고. 아마 누구에게나 특별히 흥미를 느꼈던 과목이 있었을 것이고 그 과목을 떠올리며 나중에 그쪽 일을 공부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그는 은퇴 후 역사를 공부하고 지금 백제유적을 안내하는 가이드 일을 하고 있다. 노후는 분명 큰 부담이지만, 어떤 관점에선 선물이기도 하다.

이현종 <HS애드 대표크리에이티브디렉터 jjongcd@hs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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