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엔 교황 베네딕토 16세(86)가 건강상의 이유로 자진사임하고 명예교황(emeritus pope)으로 비켜섰다. 교황이 생전에 스스로 물러나는 건 1415년 정치적 이유로 물러난 그레고리오 12세 이후 598년 만이었다. 그리고 13일(현지시간) 후임 교황으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76)이 선출됐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성직자가 교황이 된 건 가톨릭 2000년 역사상 처음이다. 또 비(非) 유럽권 국가에서 교황이 나온 건 시리아 출신이었던 그레고리오 3세(731년) 이후 1282년 만이다.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어 제266대 교황으로 추대된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1936년 12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58년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사제의 길을 택한 뒤 줄곧 아르헨티나 곳곳을 다니며 사목 활동에 힘썼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1976~1983년까지 이어진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를 옹호했다는 가톨릭 교회의 오명을 씻기 위해 노력한 공도 인정받았다.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에 올랐으며, 2001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새 교황이 된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자신의 교황 즉위명으로 ‘프란치스코’를 택했다. 앞으로 그는 교황 프란치스코로 불리게 된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13일 “새 교황의 이름은 아무런 수사가 붙지 않은 프란치스코”라며 “프란치스코 2세가 나온 뒤에야 프란치스코 1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교황 즉위명으로 ‘아씨시의 성인(聖人) 프란치스코’의 이름이 선택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새 교황이 평생 청빈하게 살았던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추기경 자리에 있으면서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고 직접 요리를 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빈민가를 자주 방문하는 등 청렴한 생활로 존경을 받아왔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13일 성 베드로 성당의 발코니에 나와 축복을 전하는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바티칸과 전 세계에게)’ 행사에서 성당 앞에 모인 10만여명의 신도에게 선출 소감을 밝혔다. “좋은 저녁입니다”라고 말문을 연 그는 “동료 추기경들이 저를 찾기 위해 다른 세상의 끝까지 간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변방 취급받았던 라틴아메리카 출신인 자신이 가톨릭의 수장이 됐다는 것을 유머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14일 시스티나 성당에서 교황으로서 첫 미사에 참석한다. 또 정식 즉위미사는 오는 19일 열릴 예정이다.
#남미, 가톨릭의 새 중심축으로
교황 프란치스코의 선출은 유럽의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이젠 명실상부한 가톨릭계의 중심축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외 언론들은 전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교황을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 비유하며 “고객(가톨릭 신도) 수가 늘어나고 있는 신흥시장을 더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또 “바티칸 근처에 있는 교황의 여름 별장을 라틴아메리카 등 신흥국으로 옮겨야 한다”며 “세계 가톨릭 신자 중 42%를 차지하는 라틴아메리카를 중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원래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가톨릭이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점령 때문이었다. 두 유럽국가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가톨릭을 믿지 않으면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겠다”고 압박했다. 하지만 수백년이 흐른 뒤 가톨릭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지역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가톨릭 신자 수가 50% 이상 늘어나 미국(39%), 유럽(4.9%)에 비해 큰 차이를 보였다.
#성추문·부패 등 과제 산더미
새 교황 프란치스코의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임 교황의 비밀문서 유출사건인 ‘바티리크스’에서 바티칸 사제들 간 권력 암투와 돈세탁 의혹이 불거져 나온 데다, 세계 각지에서 사제들의 아동 성추문 사건 폭로가 쏟아지면서 가톨릭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기 때문이다.
또 젊은이들 사이에서 무신론 및 동성애, 낙태 찬성론자가 많아지면서 이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 온 가톨릭의 입지가 예전보다 축소되고 있다. 당초 유력 후보자로 거론되지 않았던 교황 프란치스코가 새 교황이 된 것도 가톨릭이 전면 쇄신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CNN 등 주요 외신들은 전했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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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선출하는 비밀선거 '콘클라베'
교황은 추기경들의 비밀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이 비밀선거의 이름이 콘클라베(Conclave)다. ‘열쇠로 잠근다’는 뜻의 라틴어다. 바티칸 교황청 수석 추기경은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추기경들을 최장 20일간 기다린 후 전체 회의를 연다. 80세 미만 추기경들만이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올해 82세인 정진석 추기경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번 콘클라베엔 115명의 추기경이 참석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비밀 유지를 맹세한 후 향후 절차와 선거 개시일을 논의한다. 교황 선출 선거가 시작되는 날 오후 추기경들은 행렬을 지어 바티칸 교황청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으로 들어간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밖에 나올 수 없으며, 모든 유·무선 통신도 차단된다. 따라서 참가 추기경 외에는 콘클라베 내부 사정을 알 수가 없다.
후보는 따로 없으며 출석인원 중 3분의 2 이상을 득표한 사람이 나올 때까지 투표를 한다. 선거 개시 후 12일이 지났는데도 유효득표자가 없으면 과반 득표자를 교황으로 추대한다. 이번 새 교황 프란치스코의 경우 5번의 투표를 거쳤으며, 콘클라베 개최 후 이틀 만에 선출됐다.
교황이 선출되면 투표용지를 태워 굴뚝에 흰 연기를, 그렇지 못하면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린다. 성당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연기의 색깔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이 연기의 색깔을 명확히 하기 위해 투표용지엔 특수 화학약품을 바른다. 최근엔 혼선을 막기 위해 새 교황이 결정된 순간 굴뚝에 흰 연기를 피워올림과 동시에 종을 함께 울린다.
수석 추기경은 시스티나 성당 발코니에 나가 바티칸광장을 향해 라틴어로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교황이 탄생했다’는 뜻의 라틴어)”을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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