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기업을 적으로 만들어 어쩌려는지…

입력 2013-03-20 17:00   수정 2013-05-03 16:02

성장률 1%대 곤두박질치는데 장관들은 앞다퉈 대기업 비난
코드 맞추기에 경제만 거덜날판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취재에서 돌아온 기자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지난주 일이다. 현대·기아자동차가 주최한 협력사 합동 채용박람회에 다녀오던 길이라고 했다. 취업난이 더욱 심해지던 터라 행사장은 아침부터 붐볐다고 한다.

기가 찬 일은 개막식에서 벌어졌다. 지식경제부 장관의 축사였다. 협력업체의 혁신이 모기업의 엔저(低)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부분까지는 괜찮았다. 다음이 문제였다. 모기업도 협력업체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며 군불을 지피더니 급기야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맹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기업의 구매부가 2, 3차 협력업체의 납품가를 결정한 뒤에도 재무팀이 또다시 가격을 삭감하는 경우가 있다는 둥 이런저런 사례까지 들먹이는 장관의 목소리에는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축사는 대통령이 강조한 ‘중소기업의 손톱 밑 가시’를 제거하는 노력에 앞장서겠다는 단단한 다짐으로 마무리됐다. 행사장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질 수밖에. 현대·기아차 관계자와 내빈들은 물론 협력사 사람들까지 뻘쭘해졌다고 한다.

이날 행사가 어떤 행사였나. 모기업을 믿고 함께 미래를 열어가자며 인재들에게 협력사 취업을 독려하는 자리다. 부품업체들이 필요한 인재를 구하는 것도 취업난만큼이나 어려운 탓이다. 말하자면 모기업과 협력사가 상생의 노력을 구체화하고 있는 자리인데, 그 자리에서 모기업을 상생의 적으로 규정하고 맹비난을 가한 것이다.

좋다, 현대·기아차가 인정사정없이 부품 값을 깎아대는 원흉이라고 하자. 그래도 그런 얘기를 그런 자리에서 했어야 했을까. 무엇보다 한심해진 것은 취업을 하러 온 학생들이다. 아무리 노력해 봐야 납품가나 무리하게 뜯기고, 기술까지 탈취당하는 부품업체에 취직하려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졌을까. 한 나라의 산업과 무역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장관이 이런 자리에까지 와서 비난을 해댈 정도라면 말이다.

지경부는 과천 기자실에 장관의 활약상을 담은 ‘기업 차원의 손톱 밑 가시도 없애야’라는 보도 자료를 리얼타임으로 배포했다. 게다가 기자들에게는 기사를 다뤄달라는 안 하던 부탁까지 일일이 했다니, 참 부지런하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새 정부 인사가 코드 맞추기식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발탁된 인물들은 한사코 자신들이 코드에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인물이라는 점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모두 오버한다. 사회에 진출해 로펌에서 줄곧 기업을 위해 일하던 변호사는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로 발탁되자 즉각 손톱 밑 가시인 대기업의 납품가 후려치기와 일감 몰아주기, 기술 탈취를 바로잡겠다는 코멘트를 했다. 시장주의자를 자처해온 경제부총리 후보자도 정작 청문회에 나서자 경제자유화가 중요하다며 시장경제와 상충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다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하겠다고 다짐했다.

소신과 줏대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대기업을 적으로 만들고, 중소기업만을 끌어안아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현대·기아차나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요즘 새벽 같이 출근해 아침 6시30분이면 회의를 시작한다. 장관들 생각대로라면 새벽부터 나와 부품 값 후려치기나 고심하는 한심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정 한심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를 외면한 채, 이들을 몰아붙이는 부류들이다.

따져보자. 현대·기아차는 엔저 탓에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삼성전자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수출은 곤두박질치고 경제성장률은 1%대로 급락했다. 1분기에 1%대 이하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1975년 오일쇼크, 1980년 혼란기, 1998년 외환위기 직후,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네 차례뿐이다. 한마디로 지금이 최악이라는 얘기다.

경제는 무너져도 대기업만큼은 두들겨야 속이 풀린다는 세태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업을 겨냥한 온갖 규제가 쏟아진다. 장관들이 대기업들을 비난하는 사이, 각 부처는 앞다퉈 검찰고발요청권을 따냈다. 국세청은 지하경제를 색출한다며 전방위 세무조사에 착수했고, 고용노동부는 툭하면 특별근로감독이다. 삼성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칼럼이 등장하고, 시민단체도 기업에 대한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기업을 범죄자로 내몰지 못해 안달이다. 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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