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대통령 선거 때 새누리당 캠프의 한 인사는 박근혜 후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약관련 보안사항을 얘기했던 게 보도된 직후였다. 박 후보의 첫 마디는 이랬다. “왜 그러셨어요? 이래서 저랑 같이 가시겠어요?” 이 싸늘한 말에 오금이 저렸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14개 부처 장관들에게 일일이 현안에 대한 ‘숙제’를 내줬다.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깨알 같은 지시를 내려 ‘담임선생님 리더십’이란 얘기가 나온다. 그러다 보니 박 대통령 주변에선 쓴소리는 물론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회의에서도 토론은커녕 받아 적기 바쁘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귀띔이다.
박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소통은 역대 대통령들의 성패를 좌우하는 리더십 요소였다. 특히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더 소통에 신경 써야 한다. 그의 국정목표 중 하나가 ‘창조경제’이기 때문이다. 세계 하이테크 산업을 주도하는 이스라엘이 모델인 창조경제의 필수 토양 중 하나가 소통이다.
소통 없인 창의성 안 살아나
“손발이 아닌 두뇌를 활용해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게 창조경제다. 그걸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융합이다. 연구소 간, 기업 부서 간, 정부 부처 간 벽을 허무는 것이다. 벽을 허물려면 다른 영역에 서로 간섭해야 한다. 그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면 안된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설계자인 윤종록 연세대 융합공학부 교수의 말이다.
창조경제는 박 대통령이 정부조직 개편에서 절대 양보 안 한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조직 간, 산업 간, 세대 간 간섭을 통한 융합이다. 간섭과 같은 격렬한 소통이 이뤄져야 창의성이 싹트고, 혁신적 창업이 나온다. 이를 웅변하는 게 이스라엘의 ‘후츠파(chutzpah) 문화’다.
후츠파는 ‘주제넘음, 당돌함, 놀라운 용기’란 뜻을 가진 이스라엘의 고유어다.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할 때, 직원이 상사를 대할 때, 말단 공무원이 장관에게 보고할 때 스스럼없이 자기 주장을 펴고, 당돌하게 묻는 태도가 후츠파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집이나 학교, 직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서슴없이 내는 게 옳다고 배운다. 심지어 상명하복과 위계질서가 생명인 군대에서조차 사병이 장교의 이름을 부르며 격의 없는 토론을 하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유대인은 둘인데 의견은 셋이다’란 말이 있을 정도다.
대통령에게 할 말 할 분위기 돼야
한반도 면적의 10분의 1로 천연자원이라곤 사막의 흙먼지밖에 없는 척박한 나라, 인구가 750만명밖에 되지 않고 사방이 적대적 아랍국가로 둘러싸인 소국(小國), 그러나 미국 나스닥 상장기업 수가 57개사로 한국(8개사)의 7배가 넘고, 국민 1인당 벤처펀드 규모가 세계 1위인 ‘창업대국’ 이스라엘의 성공 비결은 이 후츠파 문화에 숨어 있다.
이런 사회·문화적 토양이 배양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창조과학부라는 하드웨어만 갖춘다고 창조경제가 되는 건 아니다. 더구나 대통령의 불통 리더십으론 창조경제가 불가능하다. 무늬만 창조경제를 추진했다간 벤처기업 생태계를 제대로 만들지도 않고, 벤처 인증제도로 벤처기업만 양산했던 김대중 정부의 벤처 거품이 재현될지도 모른다.
창조경제는 사회 전반의 소통을 활성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통령부터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건 물론이다. 참모들이 박 대통령 앞에서 “왜 그러셨어요?”라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창조경제가 비로소 꽃필 수 있다.
차병석 정치부 차장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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