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관을 통과해야 할 시간,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소녀는 세관원들 중 가장 깐깐해 보이는, 그렇지만 협상이 가능할 만한 남자를 찾았다. 돈 뭉텅이를 슬며시 찔러 넣었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해삼, 녹용, 다이아몬드 등이 숨겨져 있었다.
세관을 통과하고, 소녀는 안도 한다. 이번 밀수도 성공적이었고, 이번 달은 우리 가족이 편히 살 수 있으거라 생각하며...
이는 최근 '하나의 눈물로 핀 꽃'(넥서스크로스)이라는 책을 출간한 채송하 마누카내추럴 대표(41)의 이야기다.
채송하 대표는 1983년, 13세에 가족과 함께 필리핀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타지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 의기양양하게 사업을 펼쳤던 아버지는 사업 파트너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렸다. 어머니는 그 길로 화폐가치가 높았던 일본에 건너가 식당일을 하기 시작했다. 무능력했던 아버지는 아직 어린 채송하 대표의 손을 잡고 '보따리장수'(밀수)를 시작하게 됐다.
"아버지는 제가 미성년자라는 것을 이용해 밀수를 시작했어요. 미성년자는 세관에서 보다 쉽게 통과하거든요. 해삼, 녹용, 다이아몬드, 달러, 밍크코트 등 80년대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저를 통해 밀수 했죠. 당시의 초조함은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었죠."
유년시절을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편하다'라는 생각을 하며 보냈다. 아버지는 필리핀 현지 식모와 살림을 차렸고, 채 대표는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한 채 가출을 시도했다. 그 때 나이 19살, 절망적이었던 소녀는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당시엔 모든 것이 다 아픔이었죠. 상처, 분노, 증오, 모든 것들이 가슴속에 쌓여있었어요. 거의 숨이 끊겼는데, 하느님이 살려준 것 같아요. 죽음을 한 번 겪으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를 악물고 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에 왔습니다. '성공'이 목표가 된거죠."
필리핀에서 전자공학도 였던 채 대표는 한국의 IT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국내 기업의 문턱은 높았다. 그는 시야를 '비서' 직종으로 돌렸다. 독일 BASF의 합작 회사의 독일 사장 통역 비서로 발탁된 것. 그렇게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외국인 CEO 비서실장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채 대표는 1996년 프라다코리아가 한국에 처음 런칭됐을 때 비서실장으로 투입됐다. 1999년에는 뉴브릿지캐피털에서 인수한 제일은행 은행장실에서 영국인 부행장의 비서로 발탁됐다. 부행장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고 연봉을 원하는 만큼 준다고 했다. 그녀의 나이, 갓 29살 억대 연봉을 받게 된것. 일반 회사 사장의 로망이 '억대 연봉'이었던 시기였다.
그는 그 시기를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추억했다. CEO의 업무를 함께 수행하며 통역하고 모든 것을 컨트롤 해야 했고, 할 일은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넘쳐났다. 그녀는 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남들이 보기에 부러워 할 만한 결혼 생활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채 대표는 "공허했다"고 되뇌인다.
"인생의 상처를 치유할 시간도 없이 완벽하게 사회에 흡수됐었죠. 포장은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화장대 서랍에는 수면제 2통이 구비되어 있었죠.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그리고 이혼했죠."
채 대표는 젊고 아름다웠고, 돈은 넘칠 정도로 많았고, 성공했었다. 그러나 외롭고 아팠다. 겉 모습은 화려했지만, 혼자인 시간은 초라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유년시절의 상처와 성인이 된 후 혼자서 지고나가야 하는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느니 죽는것이 낫다는 '자존심' 때문에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아프다'고 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예요. 남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아픔을 이겨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야 해요"라고 말했다.
채 대표는 이혼 후 두 번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주변엔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자신'를 찾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누구 아들인데', '어느 회사 사장인데' 등의 화려한 스펙만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진실된 사랑이 찾아왔다. 자신의 아픔, 상처, 분노를 다 털어놓아도 사랑해주는 한 사람, 바로 주민관 목사(기쁨의 교회)다.
그녀는 주 목사와 함께 뉴질랜드로 떠났다. 지금껏 벌어놓은 모든 돈을 기부하고, 빈털털이로 둘 뿐인 황량한 아스팔트 위에 몸을 던졌다.
그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사랑을 알기 위해 떠난 것이다. 현지에서 우연히 접하게된 마누카내추럴 제품은 채 대표에게 모티베이션을 줬다.
채 대표는 놀랐다. 뉴질랜드의 천연 꿀은 민간요법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 마치 우리나라에서 뜨거운 불에 데이면 '된장'을 바르는 것처럼, 온갖 상처에 꿀을 바르고 있었다. 특히 마누카내추럴 제품은 아토피 피부염의 진정에 효과가 뛰어났다.
"아토피 피부염을 낫기 위해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은 식단과 보습제예요. 지속적으로 보습제를 발라야 하고 신선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은 쉽게 치료를 포기하게 됩니다. 마누카내추럴을 경영하면서 그들을 돕고 싶었어요."
마누카내추럴은 (사)대한아토피협회 주관으로 열린 '2012 아토피케어엑스포'에서 아토피 우수 제품으로 선정됐다. 채 대표는 아토피 피부를 방치하고 있는 사회소외계층의 아이들을 위해 제품을 후원하고, 관리하는 봉사를 펼치고 있다.
채 대표는 장기적인 비젼을 가지고 아이들이 성장하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기업으로 육성할 것을 다짐한다. "결국엔 잘 죽는 것이 목표예요.(웃음) 저와 같이 큰 아픔을 지고 있는 이들에게 소통할 수 있는 문고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
키즈맘 김예랑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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