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울린 뮤지컬’이란 명성은 지난해 12월 개봉된 휴 잭맨 주연의 영화로 입증됐다. ‘레 미제라블’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영화가 성공한 근본적인 요인은 뮤지컬 원작의 빼어남이다. 뮤지컬을 거의 그대로 옮긴 영화는 영상만이 구현할 수 있는 엄청난 스펙터클과 세심한 심리 묘사를 더해 원작 이상의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부르는 뮤지컬이 ‘레 미제라블’ 열풍을 이어갈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경기 용인에서 막이 오른 한국어 공연이 대구, 부산을 거쳐 지난 6일 서울에 입성했다. 제작비 200억원이 투입되고 영국 현지 제작진이 만든 이번 무대는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레 미제라블’ 25주년 개정판이자 첫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이다. 1996년과 2002년 국내 공연은 트래버 넌 연출의 오리지널 버전이었고, 이번 무대는 2010년 로렌스 코너가 연출한 새 버전이다.
오리지널 버전의 깊이있고 입체적인 무대 연출을 이 작품의 최고 미덕으로 꼽는 뮤지컬 팬이라면 새 버전에 실망할 수 있다. ‘레 미제라블’ 의 독창적인 미학을 대표하던 회전 무대와 단순하고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식 무대가 사라졌다. 회전하는 무대를 바탕으로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이뤄지던 장면 전환은 사실적인 무대 세트의 빈번한 드나듦과 영상 기법 등으로 대체됐다.
이로 인해 오리지널에서 압권이던 명장면들의 감동이 시들해졌다. 회전 무대를 사용하지 않은 바리케이드 전투 장면은 웅장함과 치열함이 줄어들었다. 최고의 뮤지컬 명곡으로 꼽히는 에포닌의 ‘나홀로’ 장면은 안타까울 정도로 초라해졌다. 무대 뒷편부터 가로등 불빛 사이로 걸어 나오며 부르는 에포닌의 모습과 노래에 쏙 빠지게 하던 깊이있는 공간 연출은 온데간데 없다. 에포닌을 무대 앞으로 밀어넣고,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무대 중간 막을 친 후 막 뒤편에서 세트를 전환한다. 절절한 짝사랑의 아픔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육중한 세트가 이동하면서 끌리는 소음마저 들린다.
새 버전은 오리지널보다 20분 가량 짧다. 그만큼 무대 전환이 신속하고 전개도 빨라졌다. 하지만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게 더 많아 보인다. 위고가 직접 그렸다는 스케치에서 영감을 받은 배경 그림과 최신 영상 기법을 활용한 연출도 인상적이지만 독창적이지 않다.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무대예술의 힘이 오리지널에 비해 약화된 느낌이다.
라이선스 공연의 관건인 번역과 가사 전달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합창과 테나르니에 등 일부 배역의 가사가 잘 들리지 않고, 번역투의 어색함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무대가 열리자마자 나오는 죄수들의 합창곡 ‘look down’의 첫 부분인 “낮춰, 낮춰”는 몇번 반복된 후에야 들린다. 영화에서 자막으로 나온 “고개 숙여”가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7개월간 10차의 오디션을 거쳐 매킨토시가 직접 골랐다는 주역들의 열연이 그나마 오리지널 무대의 향수를 달래준다. 장발장을 연기하는 정성화가 단연 돋보인다. 진성과 가성을 섞어가며 넓은 음역대를 소화하는 열창에 엄청난 연습량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정성화만큼 가성에 감정의 떨림을 담는 장발장은 세계 어디서도 보기 드물다. 문종원이 묵직한 성악톤으로 표현하는 자베르는 강렬하다. 장발장에 비견할만한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00여회의 지방 투어 공연을 함께 하며 갈고닦은 덕분인지 40여명의 출연진 모두 완성도높은 호흡을 보여줬다. 다만 기대를 모은 에포닌(박지연)과 테나르니에 부부(임춘길,박준면) 등 조연들은 주역들에 비해 흡인력이 다소 약했다.
한국 배우들의 열연이 개정판이 아닌 오리지널 버전과 만났으면 우리말로 전해지는 ‘레 미제라블’의 감동이 훨씬 더 커졌을 것이란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공연은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종료 기한을 정하지 않은 ‘오픈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5만~13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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