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사망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87)는 유럽 최초의 여성 총리였다. 지금은 독일에도 메르켈 여성총리가 있으나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97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만 해도 여성에 대한 정치권과 유권자의 개방성은 요즘과 같지 않았다. 그런 정치적 환경에서 세 번에 걸쳐(1979~1990) 총리 연임에 성공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3번 연임은 최초였으며 총리 재임 기간도 가장 길었던 ‘철의 여인’이었다.
그는 1925년 영국 동부의 작은 도시 그랜섬에서 잡화상 가게 주인 알프레드 로버츠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소매상들을 거의 천대하다시피했다. 물건을 팔아 이익을 올리는 것을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일로 여기는 사회주의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장사꾼들은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하층민이라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 도덕성이 그런 기조를 지탱해주던 시기였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옳지 않은 길은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철학을 공유하며 성장했다.
# 11년간 통치'최장수 총리'
대처는 옥스퍼드대학의 서머빌 칼리지를 졸업하고 1953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정치에 뜻을 둔 그는 1959년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됐으며 이후 주택장관 연금장관 재무장관 에너지장관 교육장관 교통장관 등을 두루 거쳤다.
다양한 업무에서 능력을 발휘하던 1974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히스 내각이 붕괴되면서 보수당 당수에 나설 수 있는 인생 최대의 분기점을 맞았다. 1975년 대처는 보수당 최초로 여성당수로 선출됐다. 4년 뒤인 1979년 선거에서 대처는 침체일로인 경제를 살리기 위한 감세정책과 법질서 회복을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해 11년간 영국을 이끌었다.
대처의 인생은 아버지와 남편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대처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정치인의 기본 자질을 배웠다. 그랜섬의 잡화상을 하던 아버지(알프레드 로버츠)는 향후 그랜섬 시장이 됐을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이런 지적 굶주림 탓인지 딸을 지역에 있는 명문 여자학교에 보냈다. 어린 딸로 하여금 신문과 책을 많이 읽도록 지도했다. 아버지는 정치 행사나 강연에 딸을 데리고 다녔고 그런 장소에서 딸이 직접 질문을 하고 토론을 하도록 독려했다.
그에게 대처라는 성을 준 남편 데니스 대처(1915~2003)는 최대 후원자였다. 남편을 만난 것은 1949년 보수당 주최로 열린 한 행사에서였다. 다트포드의 보수당 후보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로 결정한 대처 전 총리는 여기서 10세 연상인 데니스를 만났다. 영화처럼 그는 억만장자 이혼남 사업가였다. 데니스는 대처의 선거 운동을 도왔고 시나리오대로(?) 1951년 둘은 결혼했다.
대처는 데니스를 만나기 전에 화학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것. 억만장자와 결혼한 뒤엔 이런 것도 필요없어졌지만. 남편의 재정적인 지원과 전폭적인 외조 덕분에 대처 전 총리는 쌍둥이를 낳고도 변호사와 정치인으로 일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자신을 ‘그림자 남편’이라고 부른 데니스는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여성 중 한 명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언론 인터뷰에서는 데니스는 아내를 “보스(The Boss)”라고 불러 화제가 됐다. 남편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대처는 후일에 “데니스 없이 나는 11년 이상 총리로 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강성 노조 굴복시킨'뚝심'
대처를 말할 때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1982년 2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섬을 무력점령하자 해군기동부대를 파견, 두 달 만에 아르헨티나의 항복을 받아냈다. 전쟁을 벌이기 전에 그는 칠레 피노체트를 설득해 영공을 영국군대에 개방토록 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대처의 강단은 2년 뒤인 1984년 절정기를 맞았다. 가장 강력한 노조인 탄광노조의 전국파업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대처는 타협 없이 174개 국영탄광 중 경제성이 없는 20곳을 폐업하고 2만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겠다고 대응했다. 파업에 대한 강경진압과 동시에 미리 확보했던 석탄재고로 국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했다. 이듬해 노조는 파업을 풀었고 기세를 몰아 대처는 국가에 기대는 영국 복지제도를 혁파했다. 1977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물가가 25%까지 치솟았던 영국은 이후 ‘철의 여인’의 지도력하에 재탄생하는 계기를 맞았다.
대처는 초등학교 우유무상 보급도 없앴다. “우유는 부모가 먹이는 것이다. 가족이 파탄나서 우유를 못 먹이게 된 가족의 아이에 한해서만 국가가 먹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연인으로 종종 묘사되기도 했다. 두 사람이 동시대에 시장과 개인의 자유, 작은 정부, 건전한 통화정책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물결의 주축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드라마다. 대처는 1990년 유럽통합에 반대하다 당지도부의 반발로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며 1991년 정계를 은퇴했다. 치매가 그의 모든 정치적 추억을 앗아간 뒤 그녀는 매일 여행가방을 쌌다가 풀었다는 평범한 노인이 되고 말았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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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단지 더 현명하게 시작할 기회다"
대처의 말말말…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생전에 명언(名言)을 많이 남긴 정치인으로 꼽힌다. 명쾌하고 도전적인 명언은 그의 정치와 인생노선을 읽을 수 있다.
삶의 태도와 관련한 이 말은 유명하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좋은 습관을 갖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진짜 중요한 일은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도 유명하다.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는 이 얘기는 영국병을 고치는 데 있어 임전불퇴의 정신으로 나타났다. “실패는 단지 더 현명하게 시작할 기회일 뿐이다”와 “나는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말은 불굴의 투지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대처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개인과 가족은 있지만 사회? 그런 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개인의 자유와 자율·책임을 강조한 자유주의 철학이다. “‘내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줘야 한다’ ‘나는 집이 없다. 정부가 집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사회에 전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 그런 건 없다. 정부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만 일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회주의적 ‘국가책임론’을 반박한 것이다.
내부의 적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포클랜드에서 외부의 적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부의 적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내부의 적은 더 싸우기 어렵고 자유에 더 큰 위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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