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져버린 내 기억들, 잃어버린 기억들, 떠다니는 내 기억들. (…) 가슴이 아파. 내 아픔, 내 슬픔, 내 기쁨, 내 그리움을 몽땅 쏟아내고 싶어. 죽어가는 내 기억들을 띄워 보내고 싶어. 허공에, 바람에, 온 세상에. 아직은 살아남은 내 얘기를 몽땅 쏟아내고 싶어. 날려 보내고 싶어. 가벼워지고 싶어. 같이 가고 싶어.”
이름 윤금숙, 나이 80세, 체중 49㎏, 치매환자, 언어장애가 있음, 말을 못하니 부디 연락 바람. 윤금숙은 “어디로 가지? 어디로”라고 외치다 무대 뒤로 향한다. 평생 그토록 좋아하면서도 한 번도 흥얼거리지 않았다는 ‘울밑에 선 봉숭아’를 소리 낮춰 부르며.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나의 황홀한 실종기’(사진)의 마지막 장면이다. 연극은 끝났어도 70여분간 80세 치매환자가 때론 차분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털어놓은 인생 이야기의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공연은 한국 연극계 대부로 불리는 연출가 임영웅 씨(77·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의 부인인 불문학자 오증자 씨(78·서울여대 명예교수)가 연기 50주년을 맞은 손숙 씨(69)를 위해 쓴 희곡을 무대화했다. 임씨가 연출하고 손씨가 주인공 윤금숙을 연기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등 남편과 극단 산울림이 올린 번역극 대부분을 번역했던 오씨는 우연히 만난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삶을 상상하면서 그의 첫 희곡을 썼다. 기억들의 흩어짐으로 어둠의 동굴 속으로 빠져들면서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삶의 주인공임을 세상에 외치고 싶은 윤금숙이란 인물을 통해 가족 붕괴와 고령화에 따른 노인들의 정신적 황폐화 등 현대 사회의 부조리들을 지적한다.
무대를 완성하는 것은 손씨다.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린 시절 봉숭아 물을 들이던 설렘, 첫사랑 남편을 만난 가슴 떨림, 아이를 잃은 어미의 슬픔과 참담함, 남편의 현실 도피와 배신에 대한 증오 등 윤금숙의 삶을 손씨 특유의 감수성으로 절절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서정적이고 시적인 대사를 소화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열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전작인 ‘어머니’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낸다. 임씨의 단출하고 담담한 연출이 무대를 더욱 빛낸다. 기억을 되살려 삶을 성찰하게 하는 연극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지난 12일 시작된 공연은 내달 12일까지 열린다. 1만5000~5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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