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시력(詩歷) 50년을 맞는 김종해 시인(사진)이 열 번째 시집 《눈송이는 나의 각을 지운다》(문학세계사)를 냈다. 등단 50년에 내는 열 번째 시집. 잔뜩 힘이 들어갈 만도 하지만 그는 오히려 힘을 뺐다. 난해한 시어 없이 일상과 세상의 모습을 담담히 그리고, 지난날을 돌아보며 벗과 고향을 회상한다. 시집은 현재의 일상과 과거의 추억이 잘 짜여 모자이크처럼 일생을 나타낸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인간은 고독을 물리칠 수 없는 걸까. 시인은 술잔에, 포장마차에, 세상에 자신의 고독을 투영한다.
‘하루 일 끝내고/해지기 전 집으로 돌아오면/입 다물고 있는 사물과 가재도구 사이/반짝, 식탁 위의 술병이 화두를 딴다/잊혀져가는 것들 사이에서/반짝, 저녁에 눈뜨는 술병/석 잔의 술잔이 비워지기 전에/친구처럼 창밖엔 어둠이 기웃거리고/저녁밥 먹기 전에/술잔을 채우는 건 ‘나를 사랑하라’/그러나 나는 누구를 사랑했는지 알 수가 없다’(‘독작’ 부분)
‘자정을 넘긴 어느 가을밤/네 바퀴 멀쩡한 포장마차 한 대가/우리 회사 주차장에 불법주차해 있었다/은행나무에 단단히 쇠사슬로 묶인 포장마차/지쳐버린 삶의 사막과 광야를 넘어/더 이상 달리기를 거부한 포장마차’(‘달려라 포장마차’ 부분)
그럼에도 시인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결국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은 사랑이라는 것.
‘나이 칠순을 두 해 넘긴 저는 할아버지, 봄날 아침을 맞아 자술自述 할게요. 할머니를 만나 그간 2남1녀를 낳고, 2남1녀는 배우자를 만나 각기 1남1녀를 낳아 손주만 여섯입니다./(…)/지금까지 제가 선인先人에게서 물려받았던 하늘과 땅, 산과 바다, 햇빛과 공기-아직 이름 짓지 않은 모든 자연을 저는 경배합니다. 이곳에 와서 여기에서 지내다가 이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깨닫는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제가 자술할 맨 마지막 말씀도 사랑이지요’(‘아기천사와 함께’ 부분)
추억도 인간의 생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수부(水夫)로 일하며 배를 탔던 시인은 ‘젊은 날 탔던 500톤 알마크 호가 가끔 내 꿈 속으로 와 정박한다’며 ‘아직도 찾지 못한 항로 하나 찾아가고 있다’고 노래한다. 또 부산 충무동 시장, 초장제면소를 추억하고, ‘부질 없구나, 이승에서 술래잡기 하는 일. 다들 어디 갔느냐’며 이만익 화백, 최하림 오규원 이탄 시인 등 지인들을 그리워한다.
‘시인의 말’에서는 ‘시인을 위한 메시지’를 남겼다. 시인의 삶과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다.
‘시인이여, 어쩌겠는가. 그대는 그대가 가진 예각(銳角)을 지혜롭게 감춰라. 그러나 죽을 때까지 일생의 삶 속에서 예리한 날과 각을 세워 한 편의 좋은 시를 얻어야 한다. 모난 삶의 치유가 시 속에 있다. 오늘 쓰는 한 편의 시가 영원을 얻기까지 그대는 끊임없이 걸어가야 한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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