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는 외국인들 소행?…美, 등잔 밑 '자생적 테러'에 당했다

입력 2013-04-26 16:52   수정 2013-04-26 21:47

보스턴 테러, 체첸계 형제 단독범행 … 다문화 사회 그늘 짙어지는 미국

美 문화 적응 못한 이단아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만든 건 청년기 보낸 보스턴 길거리"

적은 내부에 있었는데 …
테러범 절반 이상 美 시민권자…사우디 9%·파키스탄 6% 불과…알카에다 '테러 개인화' 부추겨



“It was just us.(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끔찍한 폭탄 테러가 발생한 지 1주일이 지난 22일(현지시간). CNN은 보스턴 테러 관련 기사에 대한 헤드라인을 이같이 바꿔 달았다. 테러 용의자 형제 중 살아남은 동생 조하르 차르나예프가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자신들은 이번 사건에 배후 조직이 없는 ‘자생적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 전사)’라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알카에다 등 이슬람 급진주의자가 이들의 배후에 있을 것이라고 몰아가던 언론들은 충격에 빠졌다. 세계 4대 마라톤 대회에서 압력밥솥 폭탄을 제조해 3명을 숨지게 하고 170여명을 다치게 한 체첸계 테러범 형제가 10여년 전 미국 사회에 편입해 성장한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니…. 로렌조 비디노 스위스 안보연구센터 박사는 허핑턴포스트 20일자 ‘차르나예프 형제 이해하기’라는 칼럼에서 “이 형제를 테러리스트로 만든 것은 체첸(이슬람주의)이 아니라 청년기의 10년 이상을 보낸 보스턴의 길거리나 인터넷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분석했다.

차르나예프 형제가 자발적으로 테러를 저질렀다는 FBI의 잠정 수사 결과가 나오면서 국경을 넘은 테러가 아닌 미국 사회가 잉태한 자생적 테러를 뜻하는 ‘홈그로운 테러(Tomegrown Terror)’가 주목받고 있다.

○이슬람 테러범 50%가 미국 시민

‘홈그로운’은 원래 내 집 텃밭에서 키운 토종 먹거리를 뜻하는 말이다. 2005년 7월7일 영국 런던에서 최악의 지하철·버스 연쇄 테러가 발생하면서 범죄 용어로도 쓰이게 됐다. 총 56명을 살해하고 700여명을 다치게 한 자살폭탄 테러범들이 모두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파키스탄과 자메이카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는 서구 사회가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을 ‘악의 축’이라고 규탄한 것에 대한 저항의식이 테러의 뿌리가 됐다고 해석했다. 변방에서 분노를 키우다가 이슬람 교리를 배우면서 집단적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 당시 영국 가디언지는 “영국 사회의 모순과 서구의 탐욕이 테러범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2004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도 비슷한 테러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폭탄이 터져 190명이 사망하고 1800명이 다쳤다. 범인들은 모두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이슬람계였다.

보스턴 마라톤 테러는 ‘홈그로운 테러’라는 점에서 영국 스페인의 테러와 닮았다. 이는 수년 전부터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범죄 심리학자로 일하던 마크 세이지맨은 2008년 한 보고서에서 “알카에다의 영광은 끝났다”며 “이제 가장 큰 위협은 유럽과 미국에서 자라나는 자생적 테러범들”이라고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1일 “영국은 2005년 테러 이후 집안 단속에 성공했지만 미국은 자생적 테러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영국 싱크탱크 헨리잭슨소사이어티가 발표한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11년까지 벌어진 알카에다 연계 범죄 중 50% 이상이 미국 시민권자들 에 의한 것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은 9%에 불과했고, 파키스탄은 6%였다.

○소수민족 이민자의 문화충돌

이번 테러를 주도했던 형 타메를란(26)은 평소 “난 미국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해왔다. 차르나예프 형제는 전쟁 때문에 쫓겨다닌 비운의 가족사를 갖고 있다. 체첸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무렵 옛 소비에트연방의 민족분열 정책으로 키르기스스탄으로 강제 이주했다가 불발탄이 터지는 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 안조르 차르나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지역 검찰청에서 일하다가 옛 소련이 붕괴한 1991년 가족과 고국 체첸으로 돌아갔다.

체첸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1994년 러시아가 체첸을 침공하자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왔다. 2차 체첸전쟁이 발발한 1999년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러시아령 이슬람 자치공화국인 다게스탄으로 이주했다가 2002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자동차 정비사로 일했고, 두 아들은 착하고 평범하게 잘 자라는 듯 보였다. 동생 조하르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고 똑똑한 의사 지망생이었다. FBI와 추격전을 벌이다 사망한 형 타메를란은 미국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한때 올림픽 권투 대표선수를 목표로 했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사회·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할 나이가 되자 혼란이 찾아왔다. 두 개의 문화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왔고, 금전적 어려움도 겪었다.

CIA 관계자는 “대부분의 홈그로운 테러는 전형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소수민족 이민자들이 특정 종교나 인터넷에 빠지면서 벌어진다”고 설명했다. 형제는 5~6년 전부터 보스턴 이슬람회에 나가면서 나이트클럽 출입, 음주 등 방탕한 생활을 접고 코란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소수민족으로 겪은 문화적 소외감을 종교에서 위로받으려다가 집단적 명분에 빠져 범죄로 번졌다는 해석이다.

○테러 교과서는 인터넷·잡지

보스턴에서 터진 폭탄은 군용 폭탄이 아닌 사제 소형폭탄을 사용한 압력밥솥 폭탄이었다. 배후 조직도 없는 10~20대 형제가 이런 파괴력 있는 폭탄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알카에다는 9·11테러 이후 조직적 테러에서 개별적 테러 독려로 전략을 바꿨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근거지를 모두 파괴하고 오사마 빈라덴까지 사살하는 등 지도부가 궤멸하자 조직적 테러를 포기한 것. 알카에다는 이후 인터넷과 잡지를 활용해 세계 각국에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선동해왔다. 2011년 6월에는 ‘오직 자기 스스로 행동에 책임을 져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뿌리기도 했다.

독일 일간 디벨트는 알카에다의 온·오프라인 매거진 ‘인스파이어’가 다른 테러단체와 자생적 개별 테러리스트들이 즐겨 찾는 매체라고 전했다. 타메를란도 2010년부터 발행된 이 잡지의 광팬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테러에 사용했던 압력밥솥 폭탄 제조법은 이 잡지 제1호에 소개돼 있다. 지난해 12월 런던 증권거래소를 폭파하려 했던 파키스탄 출신 테러리스트 루크사나 베굼도 체포됐을 당시 이 잡지를 갖고 있었다.

알카에다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안사르 알무자히딘’에는 테러 목표가 암시되기도 한다. ‘다음에 어디를 공격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엔 “알라의 도움으로 이슬람인들의 노예화를 조종하는 이교도의 심장을 공격하라”고 적혀 있다. 미국 프랑스 덴마크 등에 대한 테러도 예고돼 있다. 포브스 인터넷판은 “알카에다가 인터넷으로 신규 테러리스트를 모집하는 중”이라며 “앞으로도 홈그로운 테러는 계속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보라/박병종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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