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체 게바라,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헤밍웨이, 모히토, 말레콘, 그리고 시가. 흔히 쿠바와 함께 연상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아바나에 발을 딛고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곳 사람들이었다. 마음에서 요동치는 흥을 자기 검열 없이 오롯이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쿠바야말로 진짜 자유로운 곳이 아닐까. 체제나 가난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개인의 느낌과 감정을 놀이와 여흥으로 마음껏 발산하는 이곳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바나에는 자유의 냄새가 가득하다.
○여권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는 여권에 차곡차곡 찍힌 각 나라 출입국 도장의 문양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쿠바의 입국 심사관은 멕시코 공항에서 구입한 출입국 카드 위에 도장을 꾹 누른다. 출입국 카드는 중간을 자를 수 있어 입국할 때 하나를 제출하고, 나머지 한 쪽은 잘 보관했다가 출국할 때 제출한다. 도장은 출입국 카드에만 찍기 때문에 여권에는 쿠바를 다녀왔다는 기록이 남지 않는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다 바람 맞는 것만큼 허탈해지는 순간이다. 체제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택시기사들이 비행기에서 내린 여행객을 호객하느라 분주하다. 굴러가기는 할까 싶은 구소련제 승용차에 오르니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하다. 길 위의 자갈까지도 오롯이 느껴지는 승차감이지만 시원하게 불어드는 바람에 매캐한 매연 냄새가 흩어지고 습한 공기 위로 올라온 흙내음, 쿠바의 냄새가 날아든다. 이 공기 중에는 쿠바 음악의 전설 콤파이 세군도, 대(大)문호 헤밍웨이,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의 숨결이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문화유산에 압축된 시간의 도시
쿠바의 옛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구시가지인 올드 아바나로 가는 것이 정답이다. 1982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바로크풍부터 아르데코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몇 세기에 걸친 시간을 한 공간에 압축한 듯한 느낌은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를 만날 때 배가된다. 쿠바에는 유독 오래된 차들이 많다. 1950년 이후 정부가 자동차 수입을 전면 금지한 탓이다. 클래식하고 빈티지한 매력의 색 바랜 자동차들이 스쳐 지날 때마다 마치 1950년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유쾌하다. 화려한 패턴과 색감의 옷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당차다. 골목 어귀마다 삼삼오오 모인 밴드가 만들어내는 타악기 리듬에 언제든지 몸을 맡기고 춤을 추며 즐겁게 노래한다. 아이들은 모여 축구나 야구를 하느라 즐겁고, 연인들은 세계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서로를 향한 애정 표현에 여념이 없다. 꽃을 사는 사람들이 많고, 가끔 던지는 영어 농담에는 위트가 넘친다. 구시가지 골목에는 모히토와 다이키리(럼 베이스의 대표적인 쿠바 칵테일)를 팔며 밴드 공연을 하는 카페가 많다. 그중 ‘몬세라테’와 ‘엘플로리디타’가 유명한데, 헤밍웨이가 자주 찾던 곳이라 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몬세라테’에 들어서니 7인 악단이 공연을 하며 손님의 흥을 돋운다. 럼에 콜라를 섞어 만든 쿠바리브레는 꼭 맛볼 것! 엘플로리디타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지만 단골손님 헤밍웨이가 물 마시듯 들이켠 다이키리로 훨씬 유명하다. 바의 한 구석, 헤밍웨이가 늘 앉아 있던 자리를 지금은 그의 동상이 지키고 있다. 관광객의 필수코스인 이 두 카페를 중심으로는 쿠바스러운 복장으로 앉아 있는 여인이 많다. 쿠바의 국화인 하얀 마리포사를 머리에 장식하고 장신구로 한껏 치장하고 시가를 태우며 포토제닉한 상황을 연출한다. 매혹적이지만 탐욕스럽기도 한 이들은 반복적으로 외친다. 1달러! 1달러! 영원히 남을 사진에 기록될 그들의 수고가 아깝지 않다면 선뜻 내주고, 그렇지 않다면 찍지 않을 것을 권한다. 강렬한 발음으로 분노를 담아 외치는 스페인 욕을 듣고 싶지 않다면.
○헤밍웨이를 달뜨게 한 도시
마초가 가진 매력의 선봉에 선 작가 헤밍웨이는 인생의 절반을 아바나에서 보냈다. 1928년부터 쿠바 혁명으로 추방된 1959년까지 이곳에서 받은 영감으로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집필했다. 헤밍웨이의 인생 절반을 사로잡은 이 도시의 매력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현재 아바나에서 ‘헤밍웨이의 과거’는 가장 중요한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집인 ‘핑카 비히아(la vigia)’는 ‘망루 농장’이라는 뜻 그대로 아바나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곳이다. 넓은 창을 통해서만 내부를 관람하게 돼 있는 것이 아쉽지만, 집안 곳곳에는 대문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로 가득하다.
정갈한 침실과 부엌, 많은 예술가들이 들고 났을 거실, 너른 시내를 내려다보며 글을 쓴 창조의 고뇌와 희열이 고스란히 배인 듯한 서재와 거기에 빼곡하게 채워진 많은 책과 타이프라이터, 그가 사냥한 물소·표범·사슴의 박재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마치 어디에선가 그가 살아 돌아와 말을 걸 것만 같다. 친구 헤밍웨이를 찾아온 많은 예술가들과 그와 함께 낚시를 즐기던 어부들은 이곳에서 멋진 밤들을 함께했을 것이다.
낚시광인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바닷가의 작은 마을 코히마르로 걸음을 옮겼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과 닮은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휴식 중이다. 바다는 잠잠하다. 마을 중심에는 도리아 양식의 원기둥 한가운데 헤밍웨이의 흉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헤밍웨이의 부재가 아쉬운 관광객들은 흉상과 함께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음악·예술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바나에 발을 딛고 도착해 한 말이다.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 중 최장 기간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독립 후에는 미국의 개입으로 경제적 이권 대부분을 빼앗겼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멋진 혁명가 체 게바라는 분개했지만 미국에서 금지한 향락산업의 메카가 되었고 그로 인해 대중문화가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혁명 이전까지 헤밍웨이를 붙잡아 둔 이 도시의 마력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노래와 춤으로 개인의 흥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면서도 음악과 예술을 사랑할 여유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간 문화와 자유로운 분위기는 대문호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한국적 ‘정’의 정서를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좋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바나에서의 마지막 날이 지나간다. 호텔 창 밖으로 보이는 카리브 바다가 말레콘에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아바나에서 마음에 새긴 감동과 기억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포말처럼 조각나고 바랠지라도, 이곳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켜켜이 쌓아 층위를 압축한 시간처럼, 앞으로의 시간들도 그렇게 천천히 쌓여가길, 그래서 더 많은 아름다움이 공존하기를!
아바나=문유선 여행작가 usun3003@gmail.com
■ 여행팁
언어는 스페인어를 쓴다. 화폐 단위는 페소. 조각상이 새겨진 세우세(CUC·외국인 전용화폐)와 인물이 그려진 세우페(CUP·내국인 전용화폐)가 있다. 1세우세는 1달러다. 1세우세=25세우페로 환율 차이가 크다. 원칙적으로 관광객은 세우페를 사용할 수 없지만 실질적으로는시내의 환전소(CADECA)에서 세우세를 세우페로 환전해주는 곳이 있어 싸게 여행할 수 있다. 캐나다 달러나 유로를 준비해 갈 것. 한국에서 쿠바로 가는 직항은 없다. 멕시코 칸쿤이나 캐나다 토론토에서 아바나로 입국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좋은 편은 아니다. 버스는 M-1, M-2, P-1, P-4 노선이 있지만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없으면 이용하기 쉽지 않다. 관광객을 위한 투어버스가 있으며 한 번 표를 사면 하루종일 이용할 수 있다. 쿠바의 명물인 병아리 모양의 코코택시, 자전거택시, 오토바이택시 등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쿠바에서는 호텔이 비싼 편이다.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카사(CASA)’라는 호스텔 개념의 숙박시설이 있다. 카사는 ‘집’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숙박과 더불어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 많다. 쿠바에서는 수준 높은 공연을 20세우세 안팎의 싼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뮤직, 살사도 좋지만 발레 공연은 전 세계적으로 수준이 높기로 유명하다.
해질녘의 말레콘 산책은 꼭 해보자. 카리브해의 거센 파도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7㎞ 길이의 방파제로 쿠바 사람들이 삶을 향유하는 방식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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