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한국의 골드만, 또는 맥쿼리

입력 2013-05-01 17:55   수정 2013-05-01 23:28

대형 증권사들의 '진검승부' 뛰어 봐야 실력을 키울 수 있다

박성완 증권부 차장 psw@hankyung.com



4월 마지막 날, 금융투자업계엔 기다리던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2년여를 끌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시행령 등 후속작업이 마무리되면 자기자본 3조원 이상 대형 증권회사들은 ‘종합금융투자회사’로 지정돼 새로운 수익창출 기회를 갖게 된다. 서둘러 대규모 증자를 해놓고 속앓이를 하던 증권사들은 한시름 덜게 됐다.

이제부터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누가 과연 실력 발휘를 하게 될지 궁금하다. 증권사들은 지금도 기업 인수·합병(M&A) 주관, 기업공개(IPO) 주관, 자기자본 투자 등 투자은행(IB) 업무를 하고 있다. IB 활성화와 관련해 이번 법 개정으로 달라진 것은 대형 증권사들에 기업대출이 허용된 것 하나다. 증권사들이 헤지펀드에 돈을 빌려줄 때 대상이 되는 자산을 주식과 채권에서 실물, 파생상품 등으로까지 확대하려던 방안은 무산됐다.

기업대출도 용도엔 제한이 없지만 부작용을 우려해 이런저런 보완장치들이 달렸다. 총대출한도는 일반 개인에 대한 신용융자를 포함해 자기자본의 100%, 한 기업에 빌려줄 수 있는 한도는 자기자본의 25%로 제한됐다. 계열회사에 대한 대출은 금지됐다.

업계는 이미 개인투자자들에게 나가 있는 신용융자 규모와 증권사의 건전성 기준인 영업용순자본비율(NCR)에 미치는 영향 등을 감안할 때 자기자본 3조원 기준으로 대략 1조원가량의 신규대출 여력이 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장은 증권사들이 강점을 갖는 기업 M&A 때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거나, 신생 기업을 발굴하면서 자금을 대주는 방식 등으로 활용할 것이란 전망이다. 현실적으로 은행 같은 기업대출 심사 조직이나 인력을 갖추고 있지 않아서다.

증권업계로선 나름대로 아쉬운 점이 있겠지만, 전에 없던 기회가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앞으로 증권사 간 실력 차이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10m 트랙에선 누가 잘 뛰는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100m, 1000m가 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초 자본시장법 개정이 추진된 배경은 한국에서도 미국의 골드만삭스와 같은 글로벌 IB를 한 번 키워 보자는 거였다. 자본시장 발전과 IB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2009년 도입된 자본시장법이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하자 2011년 개정 논의가 시작됐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일단 덩치가 커야 하기 때문에 ‘종합금융투자회사’라는 명칭을 내걸고 자기자본 3조원 이상으로 증자를 유도했다.

대형 증권사에만 IB 신규업무를 허용, 60여개 증권사들이 똑같은 사업영역에서 제살깎이식 경쟁을 하는 업계 구조를 바꾸겠다는 금융당국의 의도도 깔려 있었다. 대형 증권사들은 늘어난 자본의 효율성을 위해 보다 공격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커졌다. 중소형사들도 살아남기 위해 특화전략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될 것이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한국 투자은행의 모델로 골드만삭스가 아닌 호주의 맥쿼리를 들었다. 뉴욕이나 런던 같은 금융중심지에서 한국 금융사들이 경쟁하는 것은 솔직히 무리고, 아시아 등 이머징마켓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감한다. 다만 한국의 골드만삭스가 됐든, 맥쿼리가 됐든, 아니면 한국 IB 나름의 새 모델을 개척하든 투자은행들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안팎에서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

뛰어 봐야 실력이 는다. 트랙을 깔아 놓고 이런저런 이유로 붙잡으면 안된다. 금융당국은 불필요한 규제는 과감히 풀고, 꼭 필요한 감독을 철저히 하는 게 바람직하다. 자본시장법 개정이 이런 변화의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

박성완 증권부 차장 ps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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