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재계 목소리는 들어볼 가치도 없나

입력 2013-05-01 18:02   수정 2013-05-03 15:18

정치적 신념이 아무리 고결해도 결과에 대한 책임윤리도 고민해야
균형감각 갖춘 정치가가 아쉽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S&T중공업이라는 회사가 있다. 글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옛 통일중공업’이라면 금방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회사다. 매년 춘투의 진앙 역할을 한 사업장이었으니 말이다.

최평규 S&T그룹 회장은 2003년 이 회사를 인수해 고초 끝에 무분규사업장을 일궈낸 뚝심 경영인이다. 그가 언젠가 회사 정상화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말하며 정치인들에게 크게 실망한 기억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회사 인수 직후다. 노조가 정문을 봉쇄한 채 회사를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다. 국회의원들이 공장 방문을 통보해 왔다. 그는 회사 현황 자료를 준비해 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의원들이 공장을 방문하면 당연히 회사 현황을 듣고, 사측과 노조 의견을 번갈아 듣겠거니 했다. 그러나 웬걸, 그는 의원들을 만날 수 없었다. 국민의 대표라는 자들은 곧바로 노조로 향해 불법 파업을 독려하고, 어깨동무를 한 채 출정가와 구호를 외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 뒤로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파업 중인 통일중공업을 방문했다. 하지만 최 회장 얘기를 들어준 의원은 아무도 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회사 실상을 들어달라고 애걸도 해봤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악덕 자본가’라는 욕설뿐이었다.

최 회장이 오죽 답답했으면 현장을 찾아온 기자들에게 “대통령도 현장에 와보라, 대통령에게 공개토론을 요구한다”고 외쳤을까.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의 기세등등한 친노동 정책에 산업계가 전전긍긍하던 시절이다.

정치인들, 특히 국회의원들이 그렇다. 국민을 대표해 여론을 청취하고 그 여론을 토대로 법을 만든다지만, 실상은 제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여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표 앞에 균형 감각은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

며칠 전 경제5단체 부회장들이 국회를 찾았다. 여론 수렴 절차 없이 초스피드로 진행되는 소위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에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서슬이 퍼런 정권 초기에 공동 대응에 나선다는 것부터 힘들었지만, 더욱 힘들었던 것은 의원들을 만나는 것 자체였다. 여당 의원들을 만났지만 인사치레에 그쳤고, 야당 의원들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법사위 모든 의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지만, 보좌관들의 블로킹은 철옹성이었다.

오히려 면담을 회피한 사람들이 비난을 쏟아냈다. 경제민주화를 좌초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라는 논평에서 재벌이 입법권을 침해한다며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나왔다. 결국 국회가 재계에 굴복하는 꼴이라는 야당의 협박성 발언에 하도급법, 임원연봉공개법, 60세정년법 등 경제민주화 관련법들이 줄줄이 통과됐다. 나머지 법안의 향방도 뻔하지 않겠나.

경제5단체 부회장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경제민주화 법안의 부작용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범위를 확대한 하도급법은 오히려 중소기업 피해로 돌아갈 공산이 크고, 임원연봉공개법은 반기업정서를 더욱 부추길 게 분명하다. 60세정년법은 임금피크제 도입과 같은 보완책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는 하소연을 외면한 채 원안대로 통과됐다. 정치 명분으로 경제를 재단해버린 독단 중의 독단이다.

막스 베버가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베버는 모름지기 정치가라면 자신의 신념에 대한 열정과 함께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에 책임지려는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소위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다. 아무리 신념윤리가 고결하더라도 그것이 폭력성이 난무하는 현실 정치에서 이뤄질 때는 결과에 대한 책임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베버는 두 가지 도덕을 겸비하는 것을 정치인의 소명으로 여겼고, 그런 정치인을 카리스마를 지닌 좋은 정치인이라 불렀다. 반면 정치적 선의가 반드시 결과적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정치인을 유아적 정치인이라 했다. 책임윤리를 망각하는 순간, 정치가의 신념은 이미 좌절된 신념일 뿐이다. 그게 포퓰리즘이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을 겸비하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 역시 베버의 명언이다.

하지만 구멍을 뚫으려다 널빤지를 부러뜨리고 마는 것이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이다. 경제민주화가 모두를 죽이고 있다는 재계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한 ‘뱁새’들이 ‘황새’의 뜻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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