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기적의 주역, 1970년대 경제개발 1세대, 한국경제 현대화의 산 증인, 서강학파의 대두 등 표현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그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보좌진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성장기를 연 주역 중 1명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남 전 총리는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재무부장관에 발탁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평가단 회의에서 남 전 총리의 소신 있는 발언을 눈여겨보고 실무 경험이 없었던 그를 재무부장관에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남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고서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는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14년 동안 이어진 정부 관료 생활은 박 전 대통령이 발언이 현실화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임기가 끝나면 대학강단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던 그는 이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올랐다.
3·4·5 공화국 시절 14년간 한국 경제의 산업화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8·3 긴급조치, 수출 100억 달러 및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부가가치세 도입 등 한국 경제에 획을 그은 큰 사건들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증권시장 개혁, 중화학공업 육성 등 남 전 총리가 없었으면 이뤄지기 어려웠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경제대통령은 남덕우"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특별히 신임했다.
박 전 대통령이 남 전 총리가 대통령경제특보로 있던 1979년 어느 날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라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나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그의 입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 전 총리는 영면에 든 19일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무역협회장 등을 거쳐, IBC포럼 이사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으로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1970년에는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역으로 활동했지만 은퇴한 이후에는 현역보다 더 현역 같은 조언을 후배들에게 제공해왔다.
선진국 진입과 동시에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함께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 상황을 그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재무장관 5년에 경제기획원장관을 4년이나 역임한 역대 최장수 경제부총리, 특히 그가 경제부총리를 지냈던 1974~1978년은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로서 국정을 지켜봤던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개발 경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그를 두고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고인과 같은 인물들 덕분에 오늘의 한국이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한경닷컴 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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