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우물 안의 '甲乙논란'

입력 2013-05-19 17:07   수정 2013-05-20 02:00

김낙훈 <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 >


중소기업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GAP’이라고 한다. 평생 을(乙)로 살다보니 옷이라도 갑을 입어보고 싶어서라고. 물론 우스갯소리다.

요즘 ‘갑을관계’가 이슈다. ‘을’들의 항변이 봇물 터지듯 이어진다. 비단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중견기업과 중소기업,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간에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에 대해 외국은 어떻게 대처할까. 몇 년 전 도쿄 중심부에 있는 일본 중소기업청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4명의 과장급 관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갑을 관계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답변은 뜻밖이었다. “갑을관계가 도대체 뭐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기엔 산업현장에서 한국과 같은 갑을관계는 없다”고 잘라말했다.

獨·日엔 없는 '갑을 문화'

독일 취재 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과 같은 갑을관계는 제조업 강국인 독일과 일본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발주업체와 납품업체가 대등한 관계에서 비즈니스를 한다는 점이다. 이들도 완제품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부품의 단가인하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정당한 협상과정을 통해 조정할 뿐이다. 이미 합의된 가격 등 계약내용은 반드시 지킨다.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기본원칙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협력업체를 ‘막 대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서로가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갑을관계는 단가인하나 밀어내기 등으로 나타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는 일이다.

일본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딴 뒤 현지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돌아와 창업한 50대 후반의 K사장은 “발주업체의 대리에게서 반말을 들을 때마다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사업을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수십 번 있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세 가지 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협력업체는 특정 발주업체에 목을 매서는 안된다. 자기만의 특화된 기술로 무장해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래야 ‘을’에서 ‘슈퍼갑’으로 변신할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교세라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은 예외없이 이런 전략을 썼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시대에 발주업체가 협력업체를 언제까지나 껴안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실적평가 때 혁신노력 중시해야

둘째, 발주업체의 인사평가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을’을 겁박해서 이익을 낼 경우 기업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협력업체에 대한 부당한 단가인하 등으로 이익을 낸 임직원은 불이익을 줘야 한다. 평소에는 아무런 혁신노력도 기울이지 않다가 협력업체만 후려쳐서 이익을 내는 사람은 기업을 좀먹는 존재일 뿐이다. 실적평가 때 신제품 개발, 생산성 향상, 신시장 개척 등 창의적인 노력을 중시해야 한다.

셋째, 정부는 공정거래 관련법을 엄격하게 운용해야 한다. 공정거래법이나 하도급 관련법에는 부당한 거래의 유형과 처벌조항이 다양하게 들어있다. 일본 역시 부당한 거래는 이들 법으로 다스릴 뿐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집단소송제 등 처벌만을 대폭 강화하는 것은 가뜩이나 불황에 허덕이는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 자칫 시스템이 취약한 중견그룹들이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론 거래 상대방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기업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 각계가 함께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김낙훈 <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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