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고(高)는 오랜 기간 일본경제의 발목을 잡은 복병이었다.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의 수렁에서 허우적댈 때도 엔화가치는 여전히 강세를 유지했다. 지난해 가을에는 엔화 가치가 사상 최고인 달러당 70엔대 후반을 오르내렸다. 엔고라는 고질병(?)에 메스를 댄 건 아베 신조 총리였다. 그는 취임 뒤 단 5개월 만에 엔화 가치를 20% 이상 끌어 내렸다. 이른바 엔저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경기부양책인 ‘아베노믹스’가 실질적 효과를 낸 것이다. 아베노믹스의 접근법은 예전과 달랐다. 구두 개입의 강도나 양적완화 규모 모두 예상을 뛰어넘었다. 일본기업들은 엔저 덕에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소니는 5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고, 도요타 등 일본의 자동차업체도 이익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글로벌 시장 곳곳에서 일본 업체들과 경쟁을 벌이는 우리나라 기업으로선 힘겨운 싸움이 예고되는 대목이다.
#엔저 날개 단 日기업들
아베노믹스의 핵심인 엔저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수출기업들의 약진이 시작된 것이다. 한때 ‘전자왕국’의 리더였던 소니가 2012회계연도(2012년 4월~2013년 3월)에 흑자전환에 성공한 것은 살아나는 전자왕국의 상징이다. 2008회계연도 이후 줄곧 적자를 냈던 소니는 2012회계연도에 영업이익 2301억엔을 달성했다. 이는 5년 만의 흑자전환이며 전문가 예상치를 뛰어넘는 실적이다.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4.7% 늘었고, 순익도 전 회계연도 672억엔 적자에서 430억엔 흑자로 돌아섰다. 소니의 깜짝 실적은 건물 매각 등 구조조정에 따른 영향도 있지만 특히 올 1~3월에 엔화가치가 크게 떨어진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일본 최대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자동차는 2012회계연도(2012년 4월~2013년 3월)의 영업이익(연결기준)이 전 회계연도의 약 3.7배에 달하는 1조3208억엔(약 14조원)을 기록했다. 2008년 금융위기로 실적이 곤두박질친 후 5년 만에 영업이익 1조엔대를 돌파한 것이다. 엔저 효과를 온전히 누리게 되는 올 회계연도에는 영업이익이 이보다 5000억엔 늘어난 1조8000억엔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부진에 허덕이던 도요타의 실적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북미와 동남아 시장에서의 판매가 호조를 보인 덕이지만 그 배경엔 아베 정권의 대규모 양적완화에 따른 엔화 약세가 버티고 있다. 다른 자동차 업체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엔화가치 하락세가 지속되면 일본 수출업체들의 2013회계연도 이익증가엔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에서 서서히 탈출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경제엔 공포의'비상벨'
엔화 가치가 4년여 만에 달러당 100엔대로 떨어지면서 해외시장에서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한국 수출업계에 채산성 악화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수출의 경제성장 기여도가 50%를 웃도는 한국경제에도 비상벨이 울리고 있는 셈이다. 가파른 엔저로 국내 기업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국내 31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한 긴급 설문조사에서 대기업 10곳 중 4곳은 달러당 100엔대 수준의 환율이 지속될 경우 올해 순이익이 1~5%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5% 이상 급감할 것이라는 응답도 20%에 육박했다. 엔·달러 환율이 110엔을 넘으면 철강 유화 IT 수출이 10% 이상 급감할 것이란 분석이다.
엔저는 상저하고(上低下高·상반기 침체 뒤 하반기 회복)를 기대하는 국내 경제에 큰 부담을 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4분기 이후 본격화한 엔저 영향이 2분기 말이나 3분기 초부터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수출이 급감하면 기업 실적이 악화되고 이는 금융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며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풀린 돈으로'자산거품'우려
아베노믹스는 ‘엔저’에서 출발한다. 대규모 금융완화정책으로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기업실적 개선-임금인상-소비 활성화-디플레이션 탈출’의 선순환 고리가 형성될 것이라는 구상이다. 엔저라는 1차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됐다. 엔화 가치가 앞으로 더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우세하다. 문제는 이런 엔화 가치 하락이 실물경제 부활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외국 언론은 대체적으로 회의적 시각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달러=100엔’은 일본경제 해결에 결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며 “5년 전에도 엔화 가치가 달러당 100엔대까지 떨어졌지만 그 당시 일본 기업의 체질개선과 경쟁력 강화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엔저를 촉발한 금융완화정책이 ‘자산버블’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마이니치신문은 “시중에 흘러넘치는 유동성이 기업투자로 연결되지 않고 주식 및 부동산 시장으로만 쏠릴 우려가 높다”고 지적했다. 자산에 낀 거품은 언젠가는 터져 국가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입힌다. 일본은 이미 1990년대 초 자산거품 붕괴의 공포를 경험했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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