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5월16일(13:25)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두산인프라코어가 작년 10월 발행한 영구채권의 자본인정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8개월만에 종식됐다. 국제회계기준재단 산하 해석위원회(IFRSIC)가 지난 14일 “두산 영구채는 자본으로 봐야 한다”고 결론냈기 때문이다.
두산의 영구채의 자본 인정 여부와는 별개로 이번 논란은 국내 회계 제도와 관행 등에 적잖은 시사점을 남겼다는게 금융감독당국 및 회계 전문가들의 평가다.
○‘두개의 실질’이 충돌한 두산 영구채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해 영구채를 발행하면서 금융감독원에 자본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지 여부를 의뢰했다. 금감원 회계제도실은 약 6개월에 걸친 고민끝에 “두산의 영구채를 부채로 분류하도록 강제할 소지는 없어 보인다”는 의견을 내놨다. 정용원 당시 금감원 회계제도실장은 “처음 질의가 들어왔을때는 애매한 측면이 많았는데 해외 사례와 자본 및 부채에 대한 IFRS의 정의 등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자본으로 볼 수 있다는 명쾌한 결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해 10월 영구채를 발행했다. 이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제동을 걸었다. 당시는 “두산의 영구채는 한계 기업의 부실을 은폐하는데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이 간간이 개진되고, 현대상선 대한항공 등도 영구채 발행을 준비하던 때였다. 김 위원장의 생각은 “두산이 발행한 영구채까지 자본으로 인정해줘버리면 시장 질서가 혼탁해 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금융위 실무자에게 “목을 걸고 지켜라(부채로 관철시켜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신용평가사들도 “회계적인 분류와는 별개로 두산의 영구채는 실질적인 내용을 놓고 보면 자본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모순이 생겼다. 그동안 대다수 회계 전문가들은 IFRS에 대해 “경제의 실질을 중시하는 회계기준”이라고 설명해왔다. 법적으로 엄연히 다른 모회사와 자회사의 재무제표를 합친 연결재무제표 작성을 의무화한 것도 경제의 실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두산 영구채의 경우 채권의 실질적인 측면만 놓고 보면 부채에 가깝다는 의견이 다수였는데, IFRS 기준에 비춰보면 자본으로 분류해야 하는 딜레마가 발생한 것이다. 즉 ‘경제의 실질’을 중시하는 IFRS가 우리 경제의 실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금융위가 한국회계기준원에 두산 영구채의 자본 인정 여부를 재심의 하라고 지시한 뒤 열린 질의회신연석회의를 앞두고 정 전 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질의회신연석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은 ‘두 개의 실질’을 놓고서 고민하게 될 것이다.”
두산 영구채 논란을 계기로 이런 딜레마가 부각되자 한국이 IFRS를 도입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결정이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한국에는 조선 건설 화학 자동차 전기전자 등 다양한 업종의 기업들이 있는데, IFRS가 각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IFRS를 도입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IFRS도입 과정에서 ‘특수’를 누렸던 회계법인에서조차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국내 메이저 회계법인 대표는 “두산 영구채 문제는 근본적으로 따지면 한국 정부가 너무 성급하게 IFRS를 도입한데서 야기됐다”고 지적했다.
○수면위로 떠오른 회계기준원의 지배구조
작년 11월 금융위가 한국회계기준원에 두산 영구채 문제를 다시 심의할 것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적잖은 파장이 일었다. 두산 영구채 발행의 주관사를 맡았단 산업은행 실무자는 “그럴리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박용만 두산그룹회장도 “이미 금감원에서 결론을 낸 사안”이라고 잘라 말했다. 파장이 커지자 금융위는 “영구채에 대한 해석 권한은 회계기준원에 있으며, 금융위는 어떤 의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교과서적인 해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금융위의 속내는 달랐다. 금융위 내부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금융위 실무자급에서는 “회계 기준원이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고 한다. 금융위는 내심 회계기준원이 알아서 “두산 영구채는 자본으로 보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주길 바랬지만 회계기준원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회계기준원은 금융위의 재심의 지시 이후 열린 질의회신연석회에어서 “두산 영구채는 자본”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금융위 수뇌부는 두산 영구채 사건을 계기로 회계기준원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한 관계자는 질의회신연석회의에서 만장일치 결정이 난 뒤 이렇게 얘기했다.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이슈에 대해 한 쪽 손을 들어주려면 당연히 반대측의 반론을 제압할 명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증권선물위원회나 금융위원회는 상정 안건에 대해 결론을 내릴때 이런 부분을 중시한다. 그런데 질의회신연석회의의 결론 도출 과정을 보면 도무지 합당한 근거가 없다. 합의제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 떨어진다.”
다른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회계기준원은 외환위기의 산물이다. 당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 절박한 상황이었다. IMF는 그러나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여러가지를 요구했다. 그 중 하나가 회계투명성이었다. IMF 관점에서 한국은 ‘정부 주도의 분식 회계가 만연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1999년 9월 회계처리기준 제정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는 독립된 민간기구로 회계기준원을 설립했다. 한 정부부처 관계자는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독립기구로 출범했지만, 금융권에선 이번 두산 영구채 사태를 계기로 회계기준원의 '독립성'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음은 금융위 고위 관계자의 증언.
“회계기준원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는 대학교수, 회계법인 관계자, 기업관계자 등으로 이뤄진 회계기준위원회다. 정부의 입김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서 이렇게 구성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권력이 정부에서 기업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회계기준위원회가 기업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현재 구조로는 회계 기준위원회가 공공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기 힘들다.”
물론 이는 관료들만의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금융위 고위 관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건 향후 회계기준원의 지배구조에 적잖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지켜봐야할 대목이다. 한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말 “두산 영구채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일단락되면 회계기준원의 지배구조 문제를 포함해서 회계 관련 인프라에 대한 개선점이 있는지 들여다 볼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
▶[속보] 급등주 자동 검색기 '정식 버전' 드디어 배포 시작
▶[한경 스타워즈] 대회 전체 수익 2억원에 달해.. 비결은?
[한국경제 구독신청] [온라인 기사구매] [한국경제 모바일 서비스]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온라인신문협회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