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야나기 무네요시

입력 2013-05-23 17:38   수정 2013-05-23 23:42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3·1운동이 일어난 다음달 요미우리신문에 일제의 무력진압을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이 기고문은 5차례나 이어졌고 1년 뒤인 1920년 동아일보에 한국어로 소개됐다. ‘반항하는 그들보다도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다.(…) 칼의 힘은 결코 현명한 힘을 낳지 않는다.’

이어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도 실렸다. ‘내가 조선과 조선민족에게서 느끼는 누를 수 없는 애정은 그 예술에서 받은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그 예술을 통하여 깊은 존경의 마음을 조선에 바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쓴 이는 30세의 젊은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였다. 일본 공예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당시 조선의 공예를 조선사람보다 더 사랑했다고 한다. 몇 년 뒤 일제가 광화문을 철거하려 하자 그는 ‘아! 광화문’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해체를 막아냈다. 1889년 도쿄에서 해군소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7세 때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등을 답사한 뒤 서울 아현동에서 조선백자와 공예품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뒤로 21차례나 현해탄을 건넜다.

35세 때인 1924년에는 “조선 물품은 조선에 있어야 한다”며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고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도쿄에 일본민예관을 설립했다. ‘민예(民藝)’라는 말을 창시한 주인공도 그였다. 72세에 세상을 뜬 그는 20여년 뒤인 1984년 한국정부가 외국인에게 처음 주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의 산문 ‘사과’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여대생들을 인솔해 수학여행차 경주에 들렀다 대구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가난한 노인이 차장 앞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젊은 차장은 기차에서 내리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딱한 광경을 본 그는 학생들과 차표 값을 모아 건넸다.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다음 정거장에서 급히 내린 노인이 몇 분 후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두루마기에 쌀 수 있는 데까지 많은 사과를 사갖고 온 것이다. 그를 보며 그와 학생들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조선문화를 사랑한 일본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문화통치의 조력자’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불쏘시개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소중한 우리 문화들이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의 국보를 지킨 대(大)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1932년부터 문화재를 사모으기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10여년이나 앞서 조선의 혼을 지킨 그의 노력이 새삼 고맙다. 덕수궁미술관에서 내일부터 야나기 수집품 134점을 만날 수 있다니 더욱 반갑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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