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없는 의회 권력] 공공연한 비밀 '청부입법'…정부가 만들고 의원 이름으로 발의

입력 2013-05-28 17:15   수정 2013-05-29 00:32

"대통령 공약·국정과제는 의원에 할당도"
공청회 등 안거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새누리당 A의원은 지난 4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국민 건강과 관련한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법안의 내용에 대해 A의원은 거의 알지 못했다. “평일에도 지역구에서만 거의 살다시피 한다”(국회 관계자)는 A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A의원이 아니라 사실 정부부처 산하 기관이 입법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법안도 산하 기관에서 만들어 왔다. 그러나 대표 발의자엔 A의원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개정안은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발의됐지만 사실은 해당 정부부처 산하기관의 부채를 줄이려는 취지가 강했다. 그래서 법안 발의를 위해 동료의원의 서명을 받는 작업도 사실상 이 기관이 도맡아서 했다. 법안 발의자는 A국회의원이 아닌 정부부처 산하 기관이었던 셈이다.

○정부 청부입법 극성
정부가 국회의원을 동원해 발의하게 하는 ‘청부입법’은 “국회에선 공공연한 비밀”(국회 관계자)이다. 청부입법이 드러나지 않아서 이에 대한 명확한 통계는 없지만, 정부 입법은 줄어들고 의원입법은 △16대 1912건 △17대 6387건 △18대 1만2220건 등으로 급증하고 있는 걸 보면, 정부가 일을 하지 않는 건 아닐 테니 그만큼 청부입법이 많아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19대 국회 들어선 1년간 4449건으로 나타났는데, 이 추세라면 1만8000건에 육박하며 사상 최고를 기록할 전망이다.

청부입법은 주로 대통령의 공약 이행이나 국정과제를 위한 수단이다. 현 정부가 출범하고 처음 열린 4월 임시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사항은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원내대표인 이한구 의원의 명의로 대표 발의했다. 사실상 인수위나 정부의 도움을 받아 법안이 발의됐는데, 이 의원은 19대 국회 들어 대표 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법안은 47건으로 전체 9위에 올랐다.

서기호 진보정의당 의원이 최근 공개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공약이행 로드맵 및 입법 추진계획’엔 정부는 올 상반기 법률 제·개정이 필요한 공약 40개 중 24개, 하반기 53개 중 15개를 의원 입법으로 처리하기로 했다고 적혀 있다. 정부의 공약 사항에 여당 의원들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 당의 법안을 정부가 무력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도 청부입법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상민 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중순 한 시민단체와 함께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일명 선행교육금지법)’을 발의하자 강은희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달 30일 ‘공교육정상화 촉진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이 법은 교육부와 강 의원이 사전 협의를 했으며, 법안이 발의된 일주일 뒤인 이달 초 교육부는 곧바로 강 의원의 법에 대한 시행령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국회로 제한한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한국 헌법은 정부부처에도 주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회의원을 통한 입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가장 큰 이유는 “누이 좋고 매부 좋기 때문”(국회의원 보좌관)이다. 정부입법을 하려면 공청회 등을 거쳐야 하고 부처 간 협의도 거쳐야 한다. 반면 의원입법은 국회의원 10명만 있으면 된다. 10명 이상 국회의원의 발의를 통해 해당 국회에서 의결하면 바로 효력을 지닌다. 법 통과 시기를 1년까지 줄일 수 있다.

여당 소속 한 의원은 “대통령 공약이나 정부의 국정과제 등은 당·정협의나 당·정·청회의 등을 통해 정해져 의원에게 각자 할당된다”며 “정부는 빨리 공약을 실천할 수 있고, 의원은 실적을 내서 좋다”고 설명했다. 대개 대통령 공약 사항이 복지 및 지역 개발 등이어서 생색내기 좋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정부가 민감한 사안 등을 처리할 때도 여당 의원에게 미루는 경우도 있다. 기초노령연금과 장애인연금을 기초연금화해, 국민연금과 통합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이나 가스와 전력산업 민영화 관련 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돈과 정보가 모두 행정부에 있어서 국회의원들이 의존하는 경향도 있다. 한 야당 의원은 “과거 정권을 잡았을 때 보니 온갖 정보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돈이 행정부에 있다”며 “정부부처 공무원은 100만명이고, 국회의원은 한 명당 보좌진 9명에 불과한데 당연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행정부에서 제의를 해오면 적극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급증하는 정부 청부 입법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부입법은 시간과 예산을 줄여주는 등 정부의 효율성을 높여줄지 모르지만, 여론 수렴이 부족한 법안을 양산할 수 있다”며 “특히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입법부의 독립성이 훼손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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