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란 어디서 오나요? 다양한 답이 있죠. 우선 ‘몸’은 ‘나’를 이루는 중요 요소입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상황을 가정해볼까요? 어제까지 남성이었던 사람이 자고 일어났더니 여성으로 바뀌어 있다고 해보죠. 그가 이전과 동일한 자기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관계 또한 자기정체성의 중요한 근거입니다. ‘나’를 알고 기억하는 내 주변 사람들, 가령 부모님이나 친구와의 관계없이 ‘나’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몸이나 사회적 관계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입니다.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어제의 자신과 동일한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체의 변화가 전혀 없더라도, 사회적 관계가 고스란히 유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그 사람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역사’를 안다는 건 그래서 참 중요합니다. 역사는 공동체의 기억이니까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나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는 공동체나 자신을 잃어버리긴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는 것만큼이나 집단적으로 공동체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그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죠. 역사를 되새기지 않는 나라는 과거의 잘못을 딛고 일어서 진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역사에 관심을 갖는지,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지가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공동체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동체의 과거를 잘 살펴봐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던지는 물음은 이것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아마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카(E H Carr, 1892~1982, 영국의 역사학자)라는 학자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은 1장에 들어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바로 1장 내용입니다. (제 생각에 이 책의 백미는 저 뒤 5장입니다. 5장에서 저자는 역사에 대한 1장의 정의를 수정합니다. 1장 내용은 저자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었던 셈이지요. 그러니 5장까지 읽어야 역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5장 내용은 다음주에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럼 역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 볼까요. 카는 우선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합니다. 실증주의적 역사관이란 역사학을 객관적 사실의 집적(集積)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모아 잘 정리하는 것, 그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보는 것이죠.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역설하는 실증주의자(實證主義者)들은 그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하여 이 사실 숭배를 조장했다. “우선 사실을 확인하라, 그런 다음 사실에서 결론을 추출해야 한다”고 실증주의자들은 말했다. 영국에서는 이 역사관이 로크(Locke)에서 러셀(Russell)에 이르는 영국 철학의 지배적 조류인 경험론의 전통과 완전히 조화되었다. 경험주의의 인식론은 주관과 객관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로 한다. 사실이란 감각적인 인상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부터 관찰자에게로 부딪쳐 오는 것이며, 따라서 관찰자의 의식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 이것은 역사에 대한 상식적인 관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역사란 확인된 사실의 집성(集成)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된다.”
역사는 허구적 공상으로 이뤄진 문학과는 다릅니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니까요. 그러니 실증주의적 역사관은 카의 말대로 우리의 상식에 잘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카는 이 입장을 못마땅해 합니다. 왜일까요? 역사가의 주관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란, 그의 생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자체로써 말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역사가가 사실에 입김을 불어넣었을 경우에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실에 어떤 순서, 어떤 문맥으로 발언을 허용하느냐 하는 것도 역사가의 소임이다. …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한다. … 그 자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그 시대에 얽매여 있다. 역사가가 사용하는 말 그 자체, 즉 민주주의, 제국(帝國), 전쟁, 혁명이라는 말이 그 시대의 뉘앙스를 지니며, 역사가는 이런 말들을 그 뉘앙스에서 분리할 수 없다.”
역사서술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가령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책을 쓴다고 가정해볼까요? 몇 년도에 태어났고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등 그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이야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특정 관점을 갖고 그 사실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가는 더 중요한 사실과 덜 중요한 사실을 구분하고 그 것을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일을 해야 합니다. 무미건조한 연대표를 작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렇다고 역사서술이 완전히 주관적이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주관적 해석 작업이 될지언정 역사는 언제나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사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역사서술은 하나의 문학이 될 따름입니다. 그렇게 역사인 척하는 문학은 늘 역사왜곡을 낳기 마련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산의 모양이 달라 보인다고 해서 산은 원래 객관적으로 형태가 없다든가, 무한한 형태가 있다든가 할 수는 없다. 역사상의 사실을 설정할 때 필연적으로 해석이 작용한다고 해서, 또 현존하는 해석이 어느 것이고 완전히 객관적이 아니라고 해서 어느 해석이든 차이가 없다든가, 역사상의 사실은 원래 객관적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역사가는 자기가 연구하는 시대를 볼 때 반드시 자기 시대의 눈을 통해서 보고, 과거의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열쇠로서 작용하는 것이라면, 역사가는 아주 실용주의적 사실관(事實觀)에 빠져서, 옳은 해석의 기준이 현재의 어떤 목적에 대한 적합성이라는 주장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이런 가설을 받아들이면, 역사상의 사실은 무(無)가 되고 해석이 전부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 역사는 완전히 객관적일 수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주관적일 수도 없습니다. 이제 카는 두 입장을 절충해 역사에 대한 저 유명한 정의를 내놓습니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므로, 이 상호작용은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역사는 뿌리도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없고 의미도 없다. 여기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최초의 대답을 하기로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는 마치 사랑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깊은 교제를 나누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아 하나가 되는 것처럼 역사도 과거 사실과 현재 역사가가 만나 나누는 대화를 통해 완성됩니다. 역사는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 사실을 해석하고, 과거 사실은 다시 역사가의 관점을 바꿉니다. 역사는 이렇게 사실과 역사가의 상호작용을 거쳐 서술된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역사서술은 모두 그런 대화의 산물입니다. 어떤 역사서술을 읽을 때, 그것이 과거 사실을 객관적으로 다뤘는가와 함께 서술자의 관점이 무엇인가도 꼭 따져 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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