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세적 저성장 끝자락에 선 한국 日처럼 '잃어버린 20년' 안되려면
국민에 희망주는 정책 만들어내야
경제성장을 유형화한 이론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건 아마 마르크스의 성장단계론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성장단계론은 공산주의의 필연성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20세기의 경험은 그의 이론이 맞지 않음을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월터 로스토는 마르크스보다 뒤에 태어난 학자로서 더 많은 역사적 경험을 유형화했기에 자본주의의 성장단계를 보다 잘 설명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경제성장이 도약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통해 로스토는 우리에게 친숙해진 인물이다. 경제성장이 당시 도약단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지금 생각하면 가소로운 측면이 없지 않지만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던 당시에 다른 생각하지 않고 경제적 성취에 집중하는 데 일조한 측면이 있다.
1960년대와는 반대 측면에서 우리는 현재 매우 중요한 성장단계에 있다. 성장률은 하락하고 젊은이들의 실업은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적 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해져 있다. 복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인프라는 열악하기만 하다. ‘갑을(甲乙) 관계’로 요약되는 자본주의의 천민적 행태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기에 이제는 당연시되는 측면마저 없지 않다. 희망의 시대가 좌절의 시대로 바뀌기에 50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죄악시하는 우리 사회의 일부 인식이 있지만 과장해서 말한다면 우리의 모든 경제적 문제의 원천은 저성장에 있다. 저성장은 성장하는 모든 사회의 궁극적인 숙명이기도 하다. 한국을 선진국의 일원으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저성장과 사회적 조화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한 경제적 상황에서 중국이나 인도의 높은 경제성장을 부러워해야 할 필요도 없다. 세계 경제성장의 경험은 그들도 머지않아 우리의 길을 따라올 것이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고민해야 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저성장이 궁극적으로 다다를 곳이 어디인가이다. 경제성장은 추세적 요인과 경기변동적 요인의 합으로 이뤄진다. 경기변동은 추세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저성장이 추세적 하락 때문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불황 때문인지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야만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경제가 추세적인 측면에서 저성장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것은 서울올림픽 다음해인 1989년부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그와 같은 이행의 끝자락에 있다는 점이다.
추세적 저점 부근에서 정책실패의 전형을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이 저성장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이다. 그와 같은 이행은 1990년대 초반에 끝나고 20년의 저성장이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오랜 저성장이 1980년대 후반의 거품 때문이라고 보지만 일본의 성장률을 시간의 축에 놓고 추세선을 그려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추세적인 하락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런 추세적 하락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과 정책이 부재했기에 장기적으로 제로에 가까운 저성장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이 지금도 계속되는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추세적인 하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당국의 정책실패에 기인한 바 작지 않다. 일본의 정책실패 핵심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양적 완화는 그런 측면에서 성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민에게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가. 결론은 나쁜 측면에서 과거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재정 당국이나 통화 당국 모두 안이한 현실인식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우왕좌왕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정책당국자들이 운위하는 언어는 마치 달나라의 장난만 같고 저성장 덫에 빠질 수 있다는 인식의 절박함은 없다. 지금 우리에게 정책실패는 한 세기 전 이완용의 매국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 교수 choj@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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