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몰라.”
착 달라붙는 레슬링 유니폼을 입은 배우들이 지름 9m의 원형 레슬링 매트 위에서 70여분간 서로 끊임없이 몸으로 부닥치고 충돌하며 반복적으로 던지는 대사다. 처음엔 귓등으로 흐르던 이 말은 극이 진행되며 서서히 마음속으로 파고들더니, 후반부에 다음의 대사가 덧붙여지면서 감동을 일으킨다. “네가 어떻게 알겠어?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 중인 ‘레슬링 시즌’(사진)은 레슬링 경기와 연극을 결합한 독특한 형식과 어법으로 청소년기의 고민과 문제를 풀어놓는다. 레슬링 경기장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무대. 막이 오르면 버저가 울리고 레슬링 경기가 시작된다. 남녀 4명씩 8명의 배우가 레슬링복을 입고 사방에서 번갈아 등장해 심판의 휘슬에 맞춰 대결을 벌인다.
라운드마다 ‘고등학생 선수들’이 맞붙는 주제는 다양하다. 소문과 진실, 동성애, 정체성, 경쟁, 성폭력, 왕따, 소통의 부재 등 만만치 않은 문제를 놓고 격렬한 레슬링 몸동작과 청소년들이 많이 쓰는 비속어와 욕설, 랩과 댄스 등으로 공방을 벌인다. 경기가 과열돼 청소년극으로 보기에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들 때는 심판이 ‘스포츠맨답지 않은 추측의 유포’ ‘자세 위반’ ‘통제 불가’ 등을 외치며 개입한다.
미국인 작가 로리스 브룩이 한 고등학교 레슬링부의 교내 대표 선발 시합을 보고 쓴 희곡이 원작이다. 국내 현실에 맞게 각색했지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어색함과 거부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극은 악의적 소문에 따른 폐해 등 요즘 사회적 이슈와 맞물리며 충분한 공감대를 자아낸다.
가장 큰 덕목은 연극적 재미를 넘치도록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레슬링은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몰렸지만 연극적 언어로 펼쳐지는 레슬링 경기는 쾌감과 흥분을 제공한다. 8명의 배우가 실제 경기를 방불케 할 만큼 무대에서 뒹굴고 넘어지며 뿜어내는 에너지는 연극을 살아 숨 쉬게 한다. 청소년들의 언어와 눈높이로 펼쳐지지만 성인들도 볼만한 이유다.
연극이 끝나면 20분간 심판의 사회로 관객과 배우 간 즉석 토론회가 열린다. ‘포럼 연극’을 시도하는 자체는 좋지만 인기 투표식으로 배우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며 줄 세우는 방식은 관객의 반감을 살 수 있다. 썩 교육적이지도 않고 극적 여운도 떨어뜨린다. 공연은 오는 9일까지, 1만~3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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