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실패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벤처정책

입력 2013-06-04 17:11   수정 2013-06-04 23:19

실패 경험을 무시해온 정책 행보
요행 바라고 모래 위에 집짓는 격…만사가 그런데 성공 장담하겠나

이제민 <연세대 교수·경제학 leejm@yonsei.ac.kr>



새 정부의 창조경제는 벤처 육성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일단은 맞는 방향으로 보인다. 경제이론으로 보면 창조경제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계속 논의해온 ‘요소 투입에 의한 성장’이 아니라 ‘생산성 증가에 의한 성장’을 하는 경제인 것이다.

한국 경제는 위기 후 생산성 증가에 의한 성장을 해 왔나. 생산성에 대한 연구를 보면 위기 전에 비해 그 증가율이 올라갔다는 결과와 떨어졌다는 결과가 엇갈리고 있다. 위기 후 생산성 증가율이 올라간 분명한 증거는 없는 셈이다.

생산성 증가율이 올라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체로 이렇게 추정된다. 위기 후 대기업은 구조조정을 통해 불요불급한 인력을 정리한 뒤 근로자들의 노동 강도를 올리고, 연구개발(R&D)을 강화함으로써 생산성 증가율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방출되거나 고용 기회가 줄어든 근로자들을 생산적으로 고용해줄 주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영세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막노동자 등이 됐다. 영세자영업자는 음식업, 숙박업 같은 서비스업에 밀집하게 돼 제조업 생산성이 증가하더라도 서비스업 생산성은 증가하기 어렵게 됐다. 이런 구도 하에서 경제 전체의 생산성이 오르기는 어렵다. 따라서 생산성 증가 문제는 위기 후 한계에 달한 대기업 위주의 성장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 방식을 찾는 문제다. 그 주체는 중소·벤처기업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창조경제, 즉 생산성 증가에 의한 성장의 문제는 바로 중소·벤처기업의 육성 문제인 것이다.

1997년 위기 직후 집권한 김대중정부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김대중정부는 대기업의 구조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새로운 성장 주체로서 중소·벤처기업을 지목하고, 그중에서도 벤처기업을 집중 육성했던 것이다. 그것은 옳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방향이 옳다고 꼭 결과가 잘 나오지는 않는다. 김대중정부는 온갖 정책과 막대한 예산을 동원해 벤처 열풍을 일으켰지만 곧 거품과 스캔들로 추진 동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부담 때문인지 노무현정부와 이명박정부 때는 벤처 이야기가 쑥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 한편 대기업이 구조조정 후 이윤 위주 경영을 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속에서 중소기업은 오히려 더 위축됐다.

박근혜정부는 벤처 육성을 위해 세제 혜택, 금융 지원, 펀드 조성, 규제 완화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동원할 태세다. 금융권에서도 각종 방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국책 연구기관들도 창조경제 업무에 열중하고 있다. 이제 무엇을 하든 창조경제에 갖다 붙이는 모양새다.

당연히 일각에서는 김대중정부 때와 같은 거품과 스캔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벤처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조성해서 그때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중정부인들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문제는 그때 벤처 정책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정도 정책이었으면 정부에서 ‘백서’라도 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기야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한 백서도 없는 터에 벤처정책에 대한 백서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위기 후 새로운 성장 국면을 여는 데에 유일하다시피 한 방안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백서가 없는 것은 위기 자체에 대한 백서가 없는 것만큼이나 문제다.

벤처정책은 한 예일 뿐이다. 한국의 정책은 과거의 실패 경험을 반추해서 시행되는 경우가 드물다. 과거 경험은 한자리에 1년을 머무르기 어려울 정도로 인사 이동이 심한 공무원의 개인적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인도 단편적 개인 기억에 의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구도 하에서는 과거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현 정부의 벤처정책은 요행히 성공할지 모르지만, 만사가 그런 식이어서는 어디에서 어떤 복병을 만날지 모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규모가 한국에 비해 매우 작은 태국도 백서를 냈는데 한국은 내지 않았다. 그런 식이 모든 영역에서 관행이 된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현 정부의 벤처정책이 그런 문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제민 <연세대 교수·경제학 leej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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