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끼가 옥수수 13알이었어요. 배고파서 쥐까지 먹었습니다. 70% 정도가 그곳에서 굶어죽었어요.” 평북 의주의 제7포로수용소(천마포로수용소)에 2년 동안 갇혔다가 1953년 정전협정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증언이다. 6·25 때 납북된 국군포로와 실종자 8만2318명 중 1953년에 돌아온 사람은 8333명뿐이다. 나머지는 어떻게 됐을까.
팔순이 넘은 노병들은 “그때 국군포로들이 수용소 뒤편에 무더기로 묻혔다”며 “지금이라도 정부가 국군포로를 찾고 그들의 시신을 발굴하겠다면 우리 증언부터 채록하라”고 말한다.
전쟁 중 무공훈장까지 받은 한만택 씨는 1953년 포로로 잡혀 북에 억류됐다가 51년 만인 2004년 경남 진주에 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해 12월27일 밤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로 탈출한 그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으로 끌려가 광산에서 막노동에 시달리다 2009년 숨졌다. 최근 이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분노했고, 그저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우리 정부는 1994년 국군포로 출신 조창호 소위가 귀순하기까지 포로명단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1년 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비전향장기수 64명을 전원 북으로 보내면서 ‘햇볕정책’을 썼지만, 돌아온 건 “국군포로는 없다”는 말뿐이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사선을 넘어 탈출한 포로가 80명이나 되고 그 중 51명이 살아 있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포로 송환을 위해 모든 외교력을 동원하고 돈을 써서라도 자국민을 데려와야 한다. 미국 정부 산하의 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는 지난해 북한에서 발굴한 미군 유해 400여구를 송환하고 이 중 한국군 유해 12구를 우리나라로 보내줬다. 이 과정에서 2800만달러를 썼다고 한다. 유해 한 구당 7만달러였다.
북한에 있는 생존 포로는 약 500여명으로 평균 연령이 80세를 넘어서고 있다. 시간이 없다. 다행히 국군포로 국내 송환 운동을 펼쳐온 물망초재단(이사장 박선영 전 국회의원)이 지난달 국군포로신고센터를 열고 명단 작성과 생사 확인에 나섰다고 한다. 이 재단이 10여년 전부터 국군포로와 피랍자들을 상기하자며 벌여온 ‘물망초 배지 달기 운동’이 결실을 맺길 빈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다.
현충일인 오늘 강원 양구 도솔산 격전지에서는 6·25추념행사 ‘물망초 예술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낭송될 신경림 시 ‘휴전선을 떠도는 혼령의 노래’가 더없이 애잔하다. ‘아흔아홉 고비 황천길/ 되돌아오기 몇만 밤이던가/ 울고 떠돌기 몇만 날이던가…’ 벌써 포화가 멈춘 지 60년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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