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쟁탈전 멱살잡이까지…"원전비리 저지른 X, 패주고 싶다"
콘센트 뽑기 이색 풍경
퇴근때 뽑고 출근하면 꽂고 무릎 꿇은 여직원 볼땐 '민망'
회장님, 방문 좀 닫아주세요
절전 선언 후 회장실 문 활짝…사사건건 눈치보느라 죽을맛
50명 남짓한 직원들이 근무하는 중소기업 A사의 서울 본사 사무실. 이곳엔 이달 초부터 30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와 함께 적막과 고요가 흐르고 있다.
정부 지침을 따르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열심인 회장이 절전해야 한다며 모든 사무실의 에어컨을 끄기로 하면서부터다. 직원들이 괴로운 건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회장은 에어컨 가동을 중단한 뒤 자신의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지낸다. 사무실 규모가 크지 않다 보니 직원들의 통화 소리까지 회장실 안으로 그대로 흘러들어가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
화장실 갈 때도 눈치, 거래처와 전화 통화할 때도 눈치를 보는 상황이 올여름 내내 계속될 것을 생각하니 직원들은 죽을 맛이다. “이런 회장님을 볼 때마다 원전 부품 비리 책임자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더운 건 어떻게든 참아보겠는데 회장님 사무실 문은 제발 닫아줬으면 좋겠어요.”
김 과장 이 대리들의 더위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올해는 평소보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온 데다 전력대란 우려로 인해 각 기업 관리 및 총무팀의 절전 요구가 어느 때보다 강하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공공기관뿐 아니라 대부분 민간 기업들도 냉방 온도를 26도 이상으로 제한하고 있다. 말이 26도지, 직장인들이 사무실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신체 평균온도(36.5도) 이상이다. 어쩔 수 없이 절전을 강요당하며 무더위를 버텨야 하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살펴본다.
◆몰래 숨어 야근하는 신세
기업들이 냉방만 제한하는 건 아니다. B유통기업은 최근 퇴근 때 ‘콘센트 전원 뽑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컴퓨터와 핸드폰 충전기 등 직원 1인당 몇 개씩의 콘센트를 사용하고 있다 보니 이로 인한 대기전력이 많이 낭비되고 있다며 퇴근 때 콘센트 뽑기를 생활화하기로 한 것.
캠페인 실행률이 저조하자 회사 인사팀은 팀별 캠페인 준수 여부를 관리하겠다는 강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 때문에 직원들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어제 저녁 퇴근 때 빼놓은 콘센트를 다시 꽂아야 한다.
기획팀에 근무하는 강 대리는 아침마다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곤혹스럽다. 치마를 입은 여직원들이 전원을 다시 연결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는 과정에서 민망한 장면이 연출되기 일쑤인 까닭이다. 강 대리를 비롯한 남자 직원들은 그때마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만 왠지 찝찝하다.
“콘센트는 왜 대부분 책상 밑에 있는 건가요. 여직원들이 콘센트를 연결할 때마다 왠지 치한이 된 느낌입니다. 차라리 절전 스위치가 달린 콘센트를 직원별로 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전자기업 B사의 고객컨설팅팀은 얼마 전 단체로 야근자용 책상 스탠드를 구입했다. 팀의 업무 특성상 다음날 오전부터 진행되는 고객별 컨설팅에 쓸 파워포인트 자료를 완성하려면 늦게까지 야근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회사 차원에서 진행 중인 절전 및 퇴근 일찍하기 캠페인 때문에 사무실 전등을 마냥 켜놓을 수도 없고 해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스탠드 구입이었다.
김 과장은 “보안 문제 때문에 파워포인트 자료를 외부에 들고 나가서 만들 수도 없어 인사팀에 사정 얘기를 했지만 ‘업무시간에 미리미리 만들라’는 차가운 대답만 들었다”고 푸념했다. 그는 가끔 관리팀에서 소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순찰을 돌 때면 스탠드를 끈 채 기다린다고 했다. “회사를 위해 일하는 건데, 회사에서 숨어서 업무를 하는 처지가 처량합니다.”
◆“그깟 선풍기 탓에 멱살잡이까지…”
A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이 과장은 얼마 전 옆 팀 리스크관리 부서의 정 대리와 사무실에서 멱살잡이까지 하면서 다툰 적이 있다. 다툼의 원인은 바로 선풍기. 회사는 오후 6시 퇴근시간이 되기 무섭게 에어컨을 일제히 꺼 버린다.
그러나 오후 6시 ‘칼퇴근’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라 그때부터 직원들은 더위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런 직원들을 달래주는 건 부서에 비치된 선풍기. 그런데 얼마 전부터 리스크팀의 정 대리가 계속 선풍기를 빌려가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정 대리는 가져간 선풍기를 스스로 돌려주는 경우도 드물었다. 계속되는 야근과 푹푹 찌는 무더위에 짜증이 난 이 과장은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정 대리의 멱살까지 잡고 말았다. “나중에 정 대리와 화해하긴 했지만 그깟 선풍기 탓에 싸움까지 갔다는 게 처량하더라고요. 이놈의 절전이 직장 동료 사이까지 망치고 있어요.”
◆주말에 속옷만 입고 업무 보기도
공기업에 근무하는 정모 과장은 날이 더워질수록 심해지는 같은 팀 남성 동료들의 땀 냄새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바로 ‘겨땀’. 냉방 제한이 심해질수록 남자 동료들이 흘리는 겨드랑이 땀 냄새 수위도 심해지고 있다는 게 정 과장의 하소연이다.
특히 팀장인 김 부장의 겨땀 냄새는 팀 내에서도 유명하다. 김 부장은 직원들에게 업무지시를 내릴 때 양손을 머리 위에 깍지 끼고 말하는 게 습관이다. 와이셔츠에 땀으로 흥건히 젖은 자국과 밀려드는 고약한 냄새는 정 과장과 같은 여직원들에겐 고역이다.
“옆자리 후배는 땀 냄새를 막겠다며 땀 억제제인 데오드란트를 쓰긴 하는데…. 하도 떡칠을 해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여름이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임 과장은 업무 특성상 주말에도 종종 출근해서 근무하곤 한다. 문제는 회사가 중앙냉방시스템이다 보니 사람이 없는 주말엔 에어컨을 켜지 않는 것. 자리에 선풍기가 있긴 하지만 평소 아이스크림만 먹어도 땀을 흘리는 임 과장으로선 견딜 수가 없다.
결국 얼마 전 토요일에 출근했을 땐 사무실에 여직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반바지에 러닝 차림으로 일을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우연히 회사에 나온 사장이 이를 목격하곤 싫은 소리를 했다.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당황한 임 과장은 “너무 더워서…”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장의 특별지시로 임 과장이 있는 사무실에 개별 에어컨 두 대가 설치됐다. 그는 “특별히 에어컨이 설치됐지만 절전 강도가 갈수록 세지고 있어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지 장담 못해요”라며 웃었다.
강경민/전설리/김병근 기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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